追慕
그리운 할머니께,
할머니 오늘 아침에 제가 어디 다녀왔을까요?
우리 이전에 살던 동네 병원에 다녀왔어요. 할머니께서 생전에 자주 찾으시던 그 병원 말이에요. 병원은 이제 막 아침 청소를 마친 듯 말끔하게 정돈되어있었고,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온 6월의 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했어요. 그렇게 눈에 익은 병원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응접실에 놓인 정수기와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돌더라고요.
제가 방학 동안 한국에 나오면 할머니 모시고 제법 드나들던 곳이잖아요. 할머니께서는 감기 기운이 느껴지거나 가벼운 병원 진료가 필요하실 때마다 이곳에서 진찰을 받으셨어요. 집에서부터 병원까지 손잡고 나란히 걸어오면서 참 많이 웃기도 하고, 제가 길거리에서 너무 크게 웃어서 할머니께 꾸중을 듣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는 같이 팔짱 끼고 종종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할머니 속상하신 일 있으면 저에게 하소연도 하시고, 저도 할머니께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던 그 길을 우리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제 오랜 세월의 추억은 마음속에만 남아있고, 동네는 더 높고 더 그럴싸한 모습의 빌딩 숲으로 탈바꿈했고, 지하철 노선도 생겼으며 지금 이곳의 교통량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늘어났어요.
그런데도 제가 한국에 올 때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여기에 오면 할머니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원장 선생님께서 아직도 병원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고 계셔 주셔서 정말 감사하거든요. 제가 할머니께 커피, 차, 생수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음료를 드시겠냐고 물어보던 그 자리에 지금도 변함없이 정수기와 커피믹스 그리고 차가 준비되어 있어요. 다만 달라진 건 할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앉아 계시던 그 자리에, 오늘은 제가 할머니를 대신해 앉아 있다는 것뿐. 그래서 정수기를 보자마자 눈물이 났던 거 같아요. 할머니는 오랜 세월 이 자리에 앉아 저를 바라보셨겠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할머니를 느껴요.
오늘도 원장 선생님께서는 변함없이 넉넉한 웃음으로 저를 맞아 주셨어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한국에 계신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어요. 오늘 저는 오래전 할머니께서 초음파 검사를 받으시던 침대에 누워 검사를 받았어요. 원장 선생님께서 갈비뼈가 욱신거릴 만큼 꾹꾹 눌러가며 아주 오랜 시간 정성껏 검진해주셨어요. 초음파 모니터를 저에게 보여주시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던 선생님의 음성에서, 중년으로 접어든 제게 혹시라도 할머니처럼 간경변이 생길까 봐 걱정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그리고 얼마 뒤, 아무 이상이 없어 다행이라며 밝게 웃으시는 원장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백석 시인의 <고향>이라는 시가 떠올랐어요.
<고향(故鄕)>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