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제가 엄마 마음에 들 날이 올까요?
심리학 공부를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어요?”라는 물음에 무조건 당연시하거나 긍정적인 대답만을 내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심리치료 시간에 어린이나 청소년으로부터 자신의 엄마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무자비한 지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듣는다.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르나 싶으면,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의 심정은 바위를 삼킨 기분이다. 그런데 과연 미성년들만이 엄마에 대한 울분을 안고 심리치료사를 찾아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많은 숫자의 장년층이 나르시시스트 엄마로부터 평생 받아온 아픈 상처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다. 활활 타는 불덩어리 같은 분노를 가슴에 담고 어린 연령의 내담자가 나를 찾아온다면, 장년층은 오랜 시간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버린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답답함, 그리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엄마 또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로부터 영원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상실감으로 인해 까맣게 타버린 마음의 재를 안고 나를 찾아온다.
모든 문화가 엄마를 신성하게 여긴다. 엄마의 모성은 거의 신앙에 가까우며, 실제로 “신은 자신의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어머니’를 보냈다”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모든 여성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인생에 중심을 잡고, 자신의 인격 성숙을 이룬 후에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경우만 봐도 명징하게 알 수 있다. 때로는 자애로운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강요되는 '헌신적인 엄마'로서 살아가려고 평생 그 역할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도 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가시나무> 노랫말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가시나무와도 같은 엄마는 아무리 사랑스러운 자식도 가슴 안에 들이지 못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아이에게 자기 개념을 투사하여 숨 막히는 집착의 삶을 살기도 한다.
누구도 자신의 엄마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엄마가 나르시시스트인 것은 결코 자식의 잘못이 아니다. 물론 이런 상투적인 표현이 작은 위로조차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르시시스트'라는 성격 장애를 가진 엄마를 두고 살아가는 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나르시시스트 엄마 손에서 자랐고, 수십 년간 나르시시스트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해온, 캐릴 맥브라이드 박사의 <과연 제가 엄마 마음에 들 날이 올까요?> 영문본으로는 <Will I Ever Be Good Enough?>를 추천하고 싶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는 게 힘이 될 때도 있고, 알면 독이 될 때도 있다는 상반된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양면성을 지닌 것은 비단 ‘앎’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접하는 모든 것이 각 개인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힘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매 순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추천 도서를 읽기에 앞서 주의 사항을 남기고 싶다. 이 책을 글로 소개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오래전 A로부터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가 요즘 <Will I Ever Be Good Enough?>라는 책을 교수님으로부터 추천받아서 읽고 있는데, 엄마와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너무 힘들고 마음 아팠어. 그래서 조금 읽다가 나에게 충분한 용기가 생기면 그때 읽으려고 지금은 접어 두었어.”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상세한 서술서를 만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분이 계시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충분히 '자기 돌봄'의 시간을 갖도록 권하고 싶다. 아무리 좋은 책도 시절 인연이 맞지 않을 때 읽으면, 오히려 독(毒)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