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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Jun 04. 2022

글쓰기

2014년 10월 31일


6개월 만에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할머니 생신에 쓴 편지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사유를 적은 것, 그리고 우리 랄라 생일 편지를 쓴 것을 제외하면 지난 10개월 동안 나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고 쓰지 못했다. 평소에 글쓰기를 책 읽는 것만큼 좋아하던 나에게 이런 변화가 찾아온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작은 지난 동안거에 읽은 Bruno Bettelheim의 <Freud and Man's Soul>을 만나게 되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혼란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읽고 이해한 것들에 대해 글로 누군가와 나누는 행위가 지닌 의미(지금까지 이 정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자 도저히 자판을 다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세월호 사고이다. 나는 멀리 미국에서 세월호의 침몰과 희생자 수색작업을 지켜보면서 며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 아픈 경험을 했다. 그 싸늘한 바닷속에서 공포와 마주한 아이들의 죽음은 나를 하염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자식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다리는 부모님들의 간절한 눈빛과 울부짖음은 팽목항의 스산함과 함께 너무도 깊이 내 가슴에 각인되어 버렸다. 솔직히 나의 글 대부분은 랄라를 키우면서 내가 느끼는 소소한 일상의 편린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하면 내 마음 또한 무거워져서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세 번째 이유는 나의 독서 습관이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나는 인생과 가치관의 격변기를 맞이했고, 독서에 있어서도 관심 분야의 변화가 찾아왔다. 이전에는 수필, 소설, 시, 심리학 및 정치과학 서적을 주로 읽었다면, 애도의 시간을 보내면서는 철학, 종교, 역사, 수행 관련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굽이쳐 흐르는 강물처럼 스스로 그러하게 된 것이었으나, 내게는 다소 생소했던 장르의 글과 친숙해지기까지 약 3년의 적응 시기를 거쳐야 했고, 그것은 나에게 귀중한 시간이었다. 할머니를 잃은 슬픔과 절망의 늪에서 내가 유일하게 온몸이 녹아내리지 않고, 다시 세상 밖으로 조금씩 발을 내딛기까지 독서는 믿음직스러운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새로운 관심 분야에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더 많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말과 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단 책을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고, 그 대신 생각하는 시간이 열 배정도 늘어났다. 그리고 마치 책에 내가 읽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자 나의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것 또한 점점 힘들어졌다.


네 번째 이유는 컴퓨터의 뇌사이다. 올여름 노트북이 예고 없이 그냥 잠들더니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급기야 데이터 복구를 위해 하드디스크를 분해해서 전문가에게 맡겼으나, 세 업체 모두 데이터를 복구하는 것에 실패했다. 하드디스크 안에 분명 모든 기록이 있는 건 확실하나, 그것을 다시 복구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을 연거푸 세 번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 나는 이참에 컴퓨터의 존/부재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찬찬히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관찰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고, 조용히 나와 마주 앉아 수개월간을 보내면서 황당->짜증-> 두려움-> 희망->간절함->실망-> 무반응-> 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치며 요동치는 감정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가수 신해철 씨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다. 그의 죽음 앞에 나는 몹시 숙연해지면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가 글을 잘 쓰고 못 쓰고 내 글의 내용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무언가 살아가면서 작지만 진솔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고,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은 용기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10월 마지막 날의 오후 햇살을 맞으며 나는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글 자국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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