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目漱石
내 그릇의 크기를 잘 가늠하고 때와 장소에 맞게 그릇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자’라고 부르며 따른다. 소위 ‘賢者(현자)’로 불리는 이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그들은 항상 여여함 속에서 더함도 모자람도 없이 딱 알맞은 만큼만 자기 그릇에 담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 조화로움이 머릿속에 담긴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란 인고의 시간을 거쳐 심어진 깨달음의 씨앗에, 선한 습관이 서서히 스며들면서 한 송이의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니 나도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른 지식만으로는 혜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에게 고질병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알음 앓이'라는 병이다. 이놈의 意識(의식)이라는 분별의 산은 너무도 넘기가 어렵다.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발버둥을 칠수록, 더 깊어진 알음 앓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여행과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시적인 방편은 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이 고질병을 치료하는 명약은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다 결국 이 부족한 머리로 생각해 낸 것이, 어차피 떨칠 수 없다면 미친 듯이 알음 앓이에 빠져보자는 광기 어린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고 분석하고 사유하면서 지난 2년을 한숨에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제 더 잃을 것도 없을 만큼 나의 알량한 살림살이를 불사르고 나서야 드디어 깨달았다. 이 모든 분주함과 번잡함이 얼마나 불필요한 선택이었는지를 말이다. 나의 체력을 한계에 밀어붙여 번다한 일상을 꾸려가다 보면, 알음 앓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어리석음에 또 한 번 낯이 화끈거린다.
“자기가 멋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을 벌여놓고, 괴롭다고 연발하는 것은 자기가 불을 활활 지펴놓고 덥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얼마 전 읽기 시작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에서 위의 문장을 마주한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가출했던 넋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했다. 그만큼 이 한 문장이 내게 끼친 파장은 몹시 넓고 깊었다. 나는 살면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사람 못지않게 나의 인생 여정에 따스한 벗이 되어준 생명체는 다름 아닌 고양이로소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름 없는 고양이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정신 나간 짓'은 그만 멈춰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요즘 나는 화마가 휩쓸고 간 집터에서 잿더미를 치우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것이 재미가 쏠쏠하다. 집안 살림을 홀라당 말아먹은 자,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자, 이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