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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Oct 30. 2022

랄라는 스무 살

딸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랄라에게,


우리 랄라가 스무 살이 되는구나. 이 한 문장만으로도 엄마는 감격스럽고 감사하단다. 랄라야, 엄마가 아주 아주 많이 아파서 눈도 얼굴도 모두 노란색으로 변했던 때를 기억하니? 그런 엄마 모습을 본 다섯 살 랄라는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가 'Banana Mommy'가 되었다고 말했었지. 그 해 여름, 엄마는 모두가 떠난 병실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몇 번인가 같은 기도를 드렸어. 랄라가 열여덟이 되어 대학생이 될 때까지만 살게 해 주신다면 다시는 어떤 소원도 빌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우리 랄라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는구나. 랄라야, 특별하고 소중한 너의 스무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얼마 전 너는 인스타그램에 이틀에 걸쳐 완성한 레고 꽃다발을 올렸더구나. 렌틸콩 크기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섬세한 레고 작품을 오밀조밀 만들어 가는 랄라의 손짓이 몹시 인상적이었단다. 너의 방에 해가 기울고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엄마는 랄라의 끈기와 인내에 대해 생각했단다. 그리고 편안한 표정으로 레고 조각을 끼워 맞추는 랄라의 얼굴이 사랑스러웠어. 랄라가 유치원에 다닐 때, 레고에 흠뻑 빠졌던 시기가 있었지. 그때도 지금처럼 차근차근 레고 조각을 맞추어가던 너의 모습이 기억나는구나. 특히 랄라가 무언가에 깊이 집중해야만 볼 수 있는 꼭 다문 입술과 단단한 눈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랄라야, 


올해 생일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폴란드 시인 Wislawa Szymborska (1923 - 2012)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의 한 부분이란다. 그 이유는 랄라가 엄마한테 해 준 말 때문이야.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처음 듣는 세미나 수업과 교수님들의 인상을 물어보니 너는 이렇게 대답하더구나. "가을 학기 강의를 맡고 계신 세 분의 교수님들로부터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출신도 연령도 다르지만 세 가지의 같은 특징이 있었어요. 첫째, 언행에 여유가 있고, 둘째,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셋째, 자신이 모르는 것은 바로 인정한다는 점이에요." 랄라의 말을 들으며 엄마는 학생들에게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몸소 보여주신 세 분의 교수님들께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단다. 


랄라야, 그럼 우리 쉼보스르카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의 한 부분을 함께 읽어 보기로 하자.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마디의 말을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말에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날개는 우리의 삶 자체를,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만들어줍니다. 만약 아이작 뉴턴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과가 그의 눈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그저 몸을 굽혀 열심히 주워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 스쿼도프스카 퀴리가 자신에게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월급을 받고 양갓집 규수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했고, 결국 이 말이 그녀를 두 번씩이나 이곳, 영혼의 안식을 거부한 채 영원히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노벨상’이라는 선물로 보답해 주는 스톡홀름으로 인도했습니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이 작품 또한 일시적인 답변에 불과하며,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통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번 더,’ 또다시 ‘한 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고, 훗날 문학사가들은 어떤 시인이 남긴 계속되는 불만족의 징표들을 모두 모아 커다란 클립으로 철하고는 그것들을 가리켜 ‘시인이 일생 동안 쓴 작품’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랄라야,


과학자나 시인뿐만 아니라, 진지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향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단다. 진지한 자세라는 건 인생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걸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착실한 마음가짐을 말하는 거야. 이것도 함께 기억해 주기 바란다. 모르면 물어보고, 찾아보고, 그래도 잘 모를 때는 그 모름을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여물어가는 거란다. 돌아가신 왕할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 중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격언이 있단다. '나는 모르겠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익어가는 벼처럼 고개를 숙일 수 있다는 이치를 엄마는 이제야 깨닫게 되는구나. 네가 당장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버겁겠지만, 때가 되면 '무지의 지'가 녹아든 삶을 우리 랄라가 살아가리라는 믿음이 엄마에게는 있단다. 


참으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단다. 이십 년 전 엄마 뱃속으로 찾아와 준 랄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나의 사랑하는 아가, 나의 영원한 아가, 스무 살이 되어도 마흔이 되어도 환갑이 되어도 너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무엇에게도 랄라의 존엄성을 저당 잡히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앞으로 펼쳐질 너의 웅장한 날개가 아름다운 비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단다. 하지만 랄라야, 날다가 지치면 언제든지 엄마 아빠의 품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따뜻한 차와 포근한 이불과 사랑스러운 엘리와 루피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쉬고 가길 바란다. 


2022년 10월 30일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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