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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Sep 27. 2023

Goodbye, Kayak!

추억과 현실

2023년 9월 26일 화요일


제법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아침, 포근한 담요 위에 앉아있는 엘리가 잠시 얼굴을 들어 창 밖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잠이 쏟아지는 듯 고개를 옆으로 뉘인다. 가끔 새소리가 들려오면 엘리는 봉긋 솟은 보드라운 삼각형 귀를 움찔한다. 지금 이 순간, 루피는 침실 발코니 의자에 앉아 있을 확률이 90%다. (정말 그럴까 궁금해져서 확인해 봤는데, 역시 루피는 지정석 위에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얼굴을 깊숙이 묻은 채, 검은 베레모 모양을 하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글을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으니, 책상 위에 놓인 호박 사탕 모양의 향초 뚜껑이 귀여운 자태를 뽐내며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난 토요일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카약(Kayak)을 떠나보냈다. 카약킹은 랄라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시작한 우리 부부의 첫 공식 취미생활이었다. 그전까지는 미국의 아동보호법 '나 홀로 아동' 연령 제한 규정을 지키느냐 랄라를 집에 혼자 놔두고 외출할 수 없었기에, 스톰과 내가 편한 마음으로 밖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생 랄라의 사춘기가 본격화되면서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내기보다 혼자 있는 주말을 선호하게 되었고, 엉겁결에 우리 부부는 시간 부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고, 때마침 스톰이 이인용 카약을 구매하면서 우리는 카약과 사랑에 빠졌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단 둘이서 카약을 차에 싣고 호수와 강을 찾았다. 주중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고, 집에서는 나날이 심해지는 사춘기 랄라의 무례한 언행과 까칠한 태도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수행 아닌 수행을 해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카약은 주말이 오면 열어볼 수 있는 선물 상자 같았다. 스톰과 함께 카약을 차에서 내려 물가로 옮기고, 필요한 장비를 제 자리에 놓고, 여름에는 시원한 얼음물을, 가을에는 따뜻한 차나 커피를 담아 떠나는 카약 여행은 꿈만 같았다. 카약을 타면서 처음으로 우리는 '호흡을 맞춘다'는 의미를 몸으로 직접 익힐 수 있었고, 둘이 함께 노를 저을 때 느끼는 고유의 리듬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는 더위를 피해 여름에는 이른 아침에 카약을 탔고, 봄가을에는 석양과 함께 카약을 탔다. 


미니멀리즘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물건이 우리 집을 떠나갔지만, 카약만큼은 언제나 묵중하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이삿짐을 꾸릴 때에도, 우리는 드넓은 태평양을 그리며 부푼 마음으로 카약을 싣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다와 하늘이 노을로 물드는 감미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카약킹을 즐겼다. 하지만 올봄에 극심한 좌골신경통을 앓게 되면서 카약과 함께 하는 삶에 균열이 생겼다. 그동안 병원을 다니고 물리치료를 받고 매일 허리 강화 운동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카약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몇 달째 차고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카약을 바라보다 우리는 이별을 직감했고, 지난 주말 카약은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정들었던 카약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헛헛함을 느끼며 지난날 읽었던 책의 밑줄 그어진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1차 성인기에 우리는 젊은 자신감을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투사한다. 하지만 에너지가 시들고 나면 이런 태도를 포기하기 쉽다. 전날 밤잠을 설쳤다고 하자. 일은 이전과 다름없이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회복이 예전만큼 빠르지 않고 자잘한 통증과 피로감이 남아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땐 보통 건강한 육체를 당연하게 여긴다. 항상 도움이 되고 나를 지켜주며 필요할 때 의지가 되고 회복도 빠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원하지 않아도 피할 수 없는 변화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은 언젠가 오기 마련이다. 그때 건강했던 육체는 적으로, 우리가 주인공인 영웅 드라마의 내키지 않는 악역으로 전락한다. 마음은 여전히 희망에 차 있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한때는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시간 역시 발목을 잡는다. 페리페테이아(Peripeteia)라고 할 만한 변화다. 우리는 끝이 정해져 있는 유한한 삶을 살지만, 죽기 전에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모든 걸 이룰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내 지인은 '삶은 부분일 뿐, 전체일 수는 없다'라고 결론 내린 것이리라. 우아한 몸과 영안실, 끝없을 것 같았던 여름과 갑작스러운 암전, 한계와 불완전함을 느낄 때 1차 성인기가 비로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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