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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Oct 21. 2023

한 남자

ある男

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1898-1967)의 '금지된 재현: Not to Be Reproduced'이 등장하는 일본 영화 <한 남자>를 감상했다. 어젯밤 영화가 끝나자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 어둠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머물고 있던 방이라는 공간은 조용했지만, 머릿속은 자유 연상의 향연으로 어수선하고 시끌벅쩍했다. 이렇게 안/밖으로 정반대의 환경이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체험이 나를 또 다른 영역으로 안내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왔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영감을 받으면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불가사의한 힘에 이끌려 이 깊은 사고의 늪에 빠지고 나면 누가 말을 붙이거나 내 이름을 불러도 정말 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순간은 길을 걷다가 어느 꽃 앞에서, 책을 읽다가 어느 문장 앞에서, 음악을 듣다가 어느 선율 앞에서, 미술관을 둘러보다가 어느 그림 앞에서, 한 줄기 바람처럼 홀연히 찾아왔다. 그 순간 마주하는 세상은 평소와 사뭇 달라 보였고 영원한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특히 엄마가 된 이후로 나는 무언가에 긴 시간 온전히 몰입하는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 없이 새로운 삶과 역할에 적응해 가는 내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가끔은 슬펐다. 묵묵히 세월의 강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만난 어젯밤의 고요는 그래서 더욱 소중했다.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둠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또 하나의 나를 찾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한 남자>라는 영화가 남겨준 여운 때문일 수도 있고, 일본어에 몰두해서 영화를 보다가 좀 다른 감정선의 울림을 경험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새롭고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영화 <한 남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우리에게 직접 던지지 않는다. 대신 차분한 전개를 통해 각자 나만의 시선과 진실을 찾아보도록 이끄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보다 좋은 배경 음악에 푹 빠져보기도 하고, 아름다운 미장센에 매료되었던 적은 있었지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림 한 점이 시시각각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만난 기억은 없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거울의 존재와 의미를 '금지된 재현'을 통해 관철시킨 <한 남자>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郎 (1975-)와 영화감독 이시카와 케이 石川慶 (1977-)의 안목에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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