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025년 10월 3일 금요일
미니멀리즘이 안팎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주위 사람들도 조금씩 내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해 주기 시작했다. 랄라도 그중 한 명이었다. 2019년 크리스마스 아침, 랄라는 부드러운 흰 바탕에 금박으로 내 이니셜이 새겨진 아담한 크기의 노트를 펜과 함께 선물했다. "엄마는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언제 어디서나 메모용으로 써도 좋고, 일기장으로 써도 좋을 거예요" 귀엽고 예쁘다는 이유로 쌓여만 가는 짐을 줄이고 싶던 터라, 딸아이의 배려가 담긴 이 선물이 내겐 참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제 문득 그 노트가 떠올라 꺼내보니, 작은 보물상자가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일상의 조각들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세상이 암흑 같았던 2020년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풍성한 독서를 즐긴 해이기도 했다. 노트에는 그해 읽었던 책들 중 유난히 마음에 남은 구절들이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고, 사이사이에는 자연 속에서 느낀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사색이 가지런한 필체로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랄라의 친구와 함께 떠났던 사막 나들이의 기록은 그때의 풍경과 정서를 생생히 되살려주었다.
2020년 11월 25일 수요일 (맑음)
이른 아침, 동트는 일출을 바라보며 자연의 숭고함과 웅장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곳에서 느끼는 일상의 감사함은 말이나 글로는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 사막을 향해 달리는 길, 캐빈은 멀미 때문에 몇 차례 토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멀미가 심한 사람에게는, 여행이 늘 용기와 준비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드디어 사막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나니, 캐빈의 속이 한결 안정되었다. 별구경을 하고 돌아올 즈음에는 랄라와 함께 과일 스무디를 즐길 만큼 회복되었다. 역시 아픔이나 어려움이 끝없이 이어지는 법은 없다. 웃는 캐빈의 얼굴이 편안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사막에서는 부엉이 소리가 몇 차례 울려 퍼졌고, 적막한 밤하늘 저편에서 들려온 그 시원한 울음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밤기온이 급격히 떨어진 사막에서 우리는 차에 시동을 켜고 좌석 열선을 켠 뒤, 따뜻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누워 '달 지붕'을 통해 별빛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 밤하늘과 조우한 뒤 도시로 향해 달렸다.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검푸른 빛에서 점차 희미한 진회색으로 변해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 믿지만, 바탕색의 변화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진다. 삶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곁에 있는 스톰만 보아도, 사막과 자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더욱 담담해져서 더 많은 내담자들이 자기 고유의 색을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바탕색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길이다. 사람도 자연도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한 하루였다.
집에 도착하자 갑자스러운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목욕을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고 밤을 맞이하는 마음도 차분해졌다. 사막을 또 찾게 될 것 같다. 잠에 들면서도 나는 사막을 떠올렸다. 까만 밤하늘과 부엉이의 울음, 모닥불을 지피며 별을 바라보던 이름 모를 노인, 랄라와 캐빈의 이야기와 웃음소리, 잠시 잠든 스톰의 얼굴, 그리고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