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난점

전쟁론

by 김동환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진리의 순수한 동기는 극히 약한 까닭에 아는 것(인식)과 하고자 하는 것(의지), 알고 있는 것(지식)과 할 수 있는 것(능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 클라우제비츠(1832), 전쟁론(On War), 제1편 전쟁의 본질 중, 류제승 옮김


위 글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제1편 전쟁의 본질 중 ‘제3장 군사적 천재’의 일부이다.


우리는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구분을 거의 두고 있지 않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할 수 있다고 믿는가 하면, 자신이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가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결과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즉 선생이 학생에게 과제물을 해 오라고 시키면, 이제 과제물은 ai가 만든다. 그 결과물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지식이나 능력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그것은 지식이나 능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만.


그러나 그런 의지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기질이다. 따라서 ai의 편리함은 일반적 수준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체계의 복잡함을 낳는다. 이젠 ai의 결과물을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요약되고 압축되는 세상에서는 인식이라는 것은 단편적이고 편협할 수 있으며, 지식은 어느 클라우드에 보관된 휘발성이 있는 창고일 뿐이다. 내 안에 그러한 정신의 배양소가 없으면, 우리는 그저 거대한 도서관의 지식을 복사하여 내놓는 무정신의 노예일 뿐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평화적 목적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내놓았지만 결국 그것은 평화적으로도 사용되는 동시에 전쟁에 사용되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으며, 수많은 과학기술이 우리를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약의 발명과 무기의 지속적인 발전은 전쟁의 개념 속에 내포된 적을 격멸하려는 성향이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전혀 변화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 말은 문명사회 속에서도 전쟁이라는 것에 적을 좀 더 치명적인 방법으로 격멸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에는 단순한 핵무기나 대륙간탄도미사일일 수도 있으나 좀 더 광범위한 그 무엇, 폭력이라는 의미의 다른 언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ai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우리는 순진하게 ‘ai를 현명하게 잘 사용하면 돼’라든지 ‘ai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거야’라는 말을 수용해야 할까. 거대한 파도가 몰아칠 때에 그것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태도는 어쩌면 선택권이 없을지도.


다만 우리의 정신을 바르게 해야 함을. 그 무자비한 핵무기의 버튼을 억제할 사람은 ai를 단순히 활용을 잘하는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사회 속에서 정신과 육체를 꾸준히 단련시켜가야 함을 느낀다.


아는 것(인지)과 하고자 하는 것(의지), 알고 있는 것(지식)과 할 수 있는 것(능력)을 구분하고 결국 할 수 있는 상태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올바른 육체와 정신이 결합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ai는 알까? ai는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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