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회사원이 아니라면

by 라디오

평생 공부했지만 내 공부의 이유를 몰랐던 나에게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 왔다.


'난 뭐 하면서 살고 싶은가?'


이 물음이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가.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고 잘하는 일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면서 돈을 벌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할 것인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생각해 봤었야 할 문제들을 스물여섯이 되어서 생각을 했다.

그래서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고 불안했다.

내가 바보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생각을 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비로소 내 인생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성과가 늘 있었기에 내가 가는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고 가면 이 길의 끝에는 만족할만한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없었다. 똑똑똑. 문을 열었는데 그냥 작은 어항이었다.


그냥 평범한 행복을 원했다.

내 일상에 불만이 있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만족하는 그런 삶.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오늘 하루에 충실한 그런 삶.

자유로우면서도 안정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게 될까. 그것을 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지만 분명 답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내가 주도하는 시간이라는 의미가 꽤 컸기 때문에 주말에 GRE 학원은 계속 다녔다.

퇴사를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계속 풀지 못하고 있던 문제의 답을 누군가 알려주었다.

같이 GRE 스터디를 하던 팀원이 어느 날 학원 전단지를 가져왔는데 그 학원이 바로 치의학/의학대학원 입시 전문 학원이었다.

순간적으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의사나 치과의사가 되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원보다는 의사가 낫지.

의사로서 개업을 한다면 자유로우면서도 안정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합격할 수 있을 거다.

전광석화처럼 결론이 따다닥 났다.

GRE 학원을 그만두고 스터디도 당연히 그만두고 치의학/의학 대학원 입학 방법을 알아보았다.


자. 의사 또는 치과의사가 되는 길이 있었다.

나에게는 저 둘 중에 하나를 골라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두근거렸다.

우선 의사라면 전문의를 따야 할 것 같았다. TV에 나오는 의사란 모두 전문의가 아니던가. 가정의학과 전문의, 내과 전문의, 흉부외과 전문의, 소아과 전문의 등등...

그런데 전문의를 따려면 의사가 되고 나서 5년을 더 수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수련과정이 어마어마하게 힘들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수련을 해내고 싶지 않았다. 대학 4년에 대학원 2년까지 치른 나로서는 인내하고 준비하는 생활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또 수능을 치르는 나이와 비교해서 많이 늦었기 때문에 빨리 직업적으로 안정되고 싶었다.

그럼 의사 말고 치과의사?
반면에 치과의사들은 전문의가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치과 대학만 나와서 바로 직업적인 커리어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치과의사들은 내가 원하던 개업의였다.


치과의사.

평소에 생각도 안 해보던 직업이다. 그러나 회사원이 아니다.

나만의 직장인 치과를 꾸릴 수 있다.

내가 직접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정할 수 있다.

내가 내 시간의 결정권자가 될 수 있다.

어서 빨리 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곳은 무한하고 자유로운 바다이길 바라며.


*치의학/의학대학원
2005년부터 10여 년 정도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치과/의과대학들은 수능을 통해 신입생을 받지 않고 치의학/의학대학원을 신설하여 신입생을 받았다. 쉽게 말해서 치과/의과대학이 없어지고 치의학/의학대학원이 생겨난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수능을 통해 바로 치과/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고, 치과/의과가 아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DEET/MEET라고 불리던 입학시험을 따로 치러서 치의학/의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치의학/의학대학원에 입학한 1학년~4학년 학생들은 치과/의과대학의 본과 1학년~4학년과 같은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받았다.

지금은 전국의 많은 치의학/의학대학원들이 다시 치과/의과대학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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