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나도 있어. 퇴사의 기억.

삶의 의미를 잃은 당신에게 퇴사를 권장합니다.

by 라디오


"남들도 다 그렇게 힘들게 다니는 거야."



만약 회사를 다니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면 참으면서 더 다닐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기약 없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빨리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첫 출근 때부터 했지만 무작정 퇴사를 하려니 나에게는 대안이 필요했다.

일단 퇴사! 이게 안되었던 것이다. 퇴사하고 이거! 나는 이게 필요했다.

처음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려고 했다. 나는 석사 학위가 있으니 박사 과정을 밟으러 가면 될 것 같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학업에 목말랐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게 퇴사하고 나서 구실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당장 GRE 학원을 등록해서 다녔다. 유학을 가려면 GRE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GRE 학원을 다니며 영어 공부를 했지만 회사만 다닐 때보다 훨씬 덜 지쳤다. 주말 이틀만 내 인생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주 현명한 생각이 났는데 박사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만에 무서운 대답이 나왔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지 않을까?


그러자 나는 유학이 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현재 다니고 있는 '이 회사'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냥 회사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나와 맞지 않았던 팀원들도 싫었고 가식적이어야만 했던 회사 분위기도 싫었고 결국엔 나도 그들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구역질 나는 상상도 싫었지만,

역시 제일 싫었던 것은 내가 회사원이라는 사실이었다.


회사원이란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하며 그의 능력과 시간을 소비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일을 하며 청춘을 바친다. 이게 정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내 청춘을 바치고 싶었다. 내가 내 시간을 쓰는 것. 나에게는 이게 필요했다.


처음에는 이런 의미로 9시 출근인데 괜히 8시까지 출근해서 1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출근 시간을 내가 정한다는 의미였다.
또라이 같은 짓이었다.


어느 날 언니에게 말했다.

사는 의미가 없으니 죽어도 될 것 같다고.

언니가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할바에 회사를 그만두자.

죽는 것보다는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훨씬 나았다.


실제로 회사를 그만둔 그날은 오만 감정이 들었다.

이상하게 마냥 기쁘지 않았다.

아쉽기도 하고 화도 나고 홀가분하고 씁쓸했다. 보란 듯이 내 자리를 깨끗이, 아주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 나왔다.

회사가 잠실에 있었는데 그 이후 한동안은 잠실에 가지 않았다.


회사 안이 정글이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했다.

지옥으로 나가게 되었지만 불안하거나 겁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용기 있다고 했다.

나는 용기가 아니라 그냥 살려고 그런 거라고 했다.


나에게 회사 밖은 오히려 희망이 넘쳤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공기가 흘렀다.

내 인생이 마술로써 리셋된 듯이 설레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김현철 님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나에게는 함께 갈 '그대'가 없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갈 길이 험하고 멀고 지루하고 외로울 것이지만, 나는 혼자 해내야 했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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