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의 산물,기다림의 미학
화가 날 때나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때
나는 손을 움직인다.
재봉틀을 놔두고 손바느질한다거나
걸레를 행주같이 하얗게 빤다거나
조리 과정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요리를 한다거나.
추운 얼음 위를 걸으며
화를 삭이는 에스키모처럼
나는 손을 움직여 생각을 정리한다.
당연히 그때의 내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전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 또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시작되었다.
보늬 밤 조림.
보늬란 밤이나 도토리의 속껍질인데
그 껍질을 다 벗기지 않고
양념에 졸이는 요리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까지
무엇 하나 수월한 것이 없다.
그 과정은 크게 재료 준비 및 손질,
삶기, 졸이기로 나눌 수 있다.
단단한 상태에서 겉껍질을 벗기다 보면
속껍질까지 상처를 내고,
그렇게 되면 졸이는 과정에서
밤이 부서져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일단은 물에 밤을 12시간 이상 불리는 것이 먼저다.
안타깝게도 나는 보통 화가 난 일이나
스트레스는 12시간 이상 가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밤이 다 불어 껍데기가 까기 좋아질 때쯤엔
밤을 불려놓은 어제의 나를 원망하는
내일의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
밤새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내 마음 같은 밤껍질을
살살 벗겨낸다. 밤 조림의 가장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과정 중 하나가 끝났다.
다음으로 겉껍질을 벗긴 밤은 양푼에 담고
밤이 잠길 만큼 물을 가득 담는다.
그리고 베이킹소다를 크게 한 숟갈 넣고
또 하룻밤을 기다린다.
(밤껍질의 떫은맛을 없애주는 과정이다)
그렇다.
밤이 두 번 지나는 동안에도 재료 손질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나를 원망하며 이틀 밤을 보내면
대망의 밤 삶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루 동안 담가둔 그 물을 그대로 넣고 삶기도 하지만 나는 물을 한번 갈아준 뒤 베이킹소다를 한 숟갈 넣어 약불에 30분 정도 삶는다.
삶은 밤을 찬물에 헹군다.
이와 같은 과정을 3~4번 반복하여야 한다.
이쯤 되면 나에 대한 원망도 사그라들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밤을 다듬기 시작한다.
찬물에 데치며 떨어져 나오는
밤의 심지와 잔털들을 정리하고,
부서진 밤들도 골라내어 먹는다.
자, 이제 마지막 졸이는 과정만이 남았다.
소독한 병이 마를 동안 냄비에 밤을 넣고,
밤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설탕을 넣는다.
다른 레시피에는 50-60% 정도 넣으라고 하지만
나는 단 것이 싫어서 40% 정도만 넣는다.
그리고 간장 조금(3~4 숟갈 정도),
와인 조금(종이컵 반 정도)을 넣고 중불에 졸인다.
(사실 전통 레시피에는 럼주를 넣으라고 하지만
술을 먹지 않는 나는 럼주라는 이름을
명탐정 코난에서 밖에 들어본 적이 없어서
집에 남아도는 답례품 와인을 주로 넣는다.)
완성한 밤 조림은 병에 담아 하루이틀쯤 뒀다가
단 것이 땡길 때 커피와 함께 먹는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 감아
바느질 못 한다고,
보늬 밤 조림이야말로 인내의 산물,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서둘러도 겉껍질은
하룻밤은 지나야 말랑해지고,
급한 마음에 삶은 밤을 우르르 쏟아버리면
애써 삶은 밤은 부서져버리고,
물에 붇지 않은 심지를 억지로 빼겠다고
이쑤시개에 힘을 줘버리면
쩍 하고 갈라져 버린다.
천천히, 느긋하게, 차분하게.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반성하며
돌아오는 에스키모처럼
뜨거운 수증기에 어리석은 나를 반성한다.
다음번에는 이렇게 오랜 시간 고생하지 않게
얼른 마음을 다스려야지, 하고 말이다.
- 참고로 화가 난 마음은 오래 묵히면 안 좋지만,
보늬 밤은 금방 먹는 것보다 며칠 더 두었다가 먹는 것이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