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음식 •
다음 주면 벌써 추석이다.
결혼 전에는 명절이 지긋지긋했다.
추석과 설, 끝없이 돌아오는 제사로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글을 떼기도 전부터
전을 부쳤다.
찐 생선의 비릿한 냄새, 가위로 곱게 오린 마른 문어,
탕국을 끓이고, 안동식혜, 단술,동그랑땡, 소고기산적,
꼬치 산적, 명태전, 고구마전 등등 없는 할머니는 살림에도 언제나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상을 차려냈다.
명절이 오기 일주일 전부터 장을 보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지만, 손님들을 다 치를 때까지
맛도 볼 수 없는 그 음식들.
그림의 떡이 따로 없었다.
내가 죽으면 제사 지내 줄 손자들은
고추 떨어진다고 주방에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손녀들은 시집가서 집안 욕을 먹이지 않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아동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요리를 배웠으나 안타깝게도
(무늬만) 천주교인 집에 시집을 와서
내 화려한 스킬은 쓸 일이 없다.
.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전 할머니를
돌본 것은 큰고모였고,
돌아가시기 전 얼굴을 비춘 것은 나뿐이었다.
제사를 지내준다고 대접받던 그 남자들 중 그 누구도 현재까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남자는 없었다.
(이런 이야길 하면 내가 해방둥이라도 되냐?
하겠지마는 82년 개띠다)
억척스러운 할머니와 살아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나는
그래도 할머니가 손맛은 참 좋았지, 라는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
없는 살림에 손주 셋을 돌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음식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배추전이다.
경상도의 음식은 대부분 간이 센 편이지만
배추전을 처음 먹으면 이건 무슨 맛인가 싶게
심심한 맛이 난다.
강원도에서도 배추전을 먹는다고 하는데
강원도에선 메밀가루를 쓰고,
대구에서는 밀가루나 부침가루를 쓴다.
.
경상도식 배추전은
배춧잎 한 장을 뜯어 줄기 부분은
칼국수 밀대 같은 걸로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어준 뒤
밀가루 반죽을 발라 구우면 끝이다.
.
얇은 잎 부분은 빨리 익어버리고,
줄기는 늦게 익기 때문에
줄기를 때려줘야 비슷한 익힘 정도가 된다.
밀가루 반죽은 다른 전보단 조금 묽게,
수저로 떠서 들었을 때
주르르르~하고 흐르는 정도.
.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찍 찍-
하며 앞뒤로 구워주면 끝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배추전은 김치를 찢듯
죽죽 찢어 돌돌 말아 먹는다.
식초를 넣어 새콤달콤한 양념간장과 함께 먹으면
배추의 단맛이 배가 된다.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가난했었고,
할머니는 짜장면은 싫다고 하셔서,
아,아니 그게 아니라;;;
가난한 시절 뒤돌아서면 배가 고픈 손주 셋.
집 나간 며느리 대신 셋이나 되는 손주를 돌보며
없는 형편에 뭐든 먹어야겠기에
때때로는 묵은지를 씻어 김밥을 싸주고,
마당 한쪽에 심은 미나리를 뜯어 밥을 비벼주고,
김장하기 전에 뜯어낸 못난 배춧잎으로
전도 부쳐주셨다..
할머니가 배운 세상이 그런 세상이라
손녀로서 내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입히고 먹인 할머니의
수고에 감사한다. (제사를 지내진 않지만
배추전 먹을 때 마다 할매 생각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