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술

내동생도 아니면서 별명이 서너개

by taesu

할머니는 손맛이 좋았다.

실수할 때마다 날아오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손맛도

좋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손맛도 참 좋았다. (농담)


명절에 여러 집을 돌며 차례를 지내고

우리 집까지 오면 다들 많이 먹어서

다른 음식은 사양하면서도

할머니가 담근 단술은 꼭 한 잔씩은 마시고 갔다.

(단술과 안동식혜는 꼭 마시고 갔는데

안동식혜는 어른이 된 지금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명절을 준비하며 나는 생선 찌는 냄새,

전 부치는 기름 냄새는 질색하게 싫지만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냄새는

단술이 익어가는 냄새였다.


단술, 서울에선 식혜라고 부르지만

대구에서는 감주, 단술이라고 불렀다.

(사전적으론 다른 거라고 한다.)


보통 할머니는 압력솥에 밥을 지었기 때문에

전기밥솥은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명절이 되면 15인분은 될 듯한 큰 전기밥솥이 나온다.


식은 밥을 엿기름과 1:1 비율로 섞은 뒤 밥이 잠길 만큼

자작하게 물을 부어 뚜껑이 있는 스테인리스 밥통에 담아 이불을 덮어 하루를 둔다.


제대로 삭은 밥은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는데,

양파망으로 옮겨 담은 뒤 물에 담가 치댄다.

그러면 뽀얀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을

전기밥솥에 옮겨 담고, 설탕과 찬밥을

한 덩이 넣고 살살 풀어준 뒤 보온을 눌러준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 밥알이 동동 떠오르며

할머니표 단술이 완성된다.

가마솥만 한 전기밥솥을 꺼내 와 먼지를 닦고,

내솥을 씻어 말리고, 엿 가루와 밥을 삭히고,

또 그 물을 짜내고, 또 기다리는 것.


번거롭고 오래 걸리지만 실패하는 법은 없다.

조기교육 덕분에 명절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른이 되고 내가 요리하는 처지가 되니

유난스럽게만 느껴졌던 할머니의 요리들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식은 단술을 옮겨 담다가 흘리면

등짝 스매싱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단술은 세계 최고로 맛있었다.


돌아가시고 나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던데

사실 난 할머니가 나 학교에 가기 전에 언니랑

남동생만 요구르트 받아주고, 난 안 받아준 것도

잊지 않고 있으니까,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다면

사과해요, 나한테~

(내가 어릴 적엔 집으로 요구르트를 배달해 먹곤 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말 못 했지만

참 많이 고마웠어요. 우리를 잘 돌봐줘서.

할머니 말대로 집안 욕 안 먹이게

좋은 어른이 되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