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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Aug 16. 2023

여름의 조각

여름, 이라고 발음해 보면 찬란한 태양의 기운이 느껴진다. 모든 순간을 빛나게 만들어줄 것 같은 느낌. 현재에 뛰어들어 더욱 격렬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자전거를 타고 초여름 나무의 연한 초록 사이를 지나며 온화한 공기를 읽는다. 한여름이 되면 뜨겁고 습한 공기가 훅 끼치고, 발걸음은 어항 속을 걷는 듯 느려진다. 초당옥수수와 토마토를 먹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바닥에 누워있다 어느새 잠이 드는 낮. 비교적 선선한 여름밤의 공기, 몸에 달라붙는 모기들과 씨름을 하면서도 기어이 산책을 하고 마는 밤. 장마가 되면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온 세상이 살균되는 여름, 어둡고 축축한 마음을 쨍한 볕 아래 꺼내어 소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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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는 수영을 다니기로 했다. 뜨겁고 무거운 여름 공기를 뚫고 시원한 물속에서 헤엄칠 생각을 하니 어쩐지 신이 났다. 여름이 오기 전부터 수영복과 수모, 수경을 주문하고 여름을 기다렸다. 습관적으로 말하곤 했다.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내 기다리던 계절이 돌아왔다. 초록과 물기를 가득 품고.


수영복과 수모, 수경을 가지런히 가방 안에 담고 수건과 속옷을 챙긴다. 잊어버린 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수영장에 가는 길은 날씨만큼이나 나의 온도를 올리는 일이다. 나는 수족냉증이 있고 몸이 차가운 편이라 쉽게 온기를 들이지 않는데, 여름이 되면 그런 나에게도 미열이 찾아온다. 습기와 더위를 물리치지 않고 친해지는 일. 몸에 힘을 빼고 뜨거운 공기가 들어 보내는 무기력함을 받아들이는 일.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참을 걷다 보면 수영장에 도착한다. 본격적으로 수영장에 들어가기 앞서 샤워실에서 몸을 깨끗이 하는 작업을 한다. 함께 쓰는 공간에 대한 배려. 내 몸에 묻은 이물질을 물과 함께 흘려보내고 수영장 계단을 밟는다.


여름의 수영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한쪽에서는 분홍 모자를 쓴 아주머니들의 에어로빅 강습이 한창이다.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꽤나 즐거워 보여 괜히 웃음이 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사람이 적당한 중급 레인에서 수영을 시작한다. 몸에 힘을 빼야 물 위에 뜰 수 있다.  물 밖에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수영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수영은 그런 운동인 것 같다. 힘을 빼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운동. 어쩌면 인생과도 닮았다는 생각에 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떠올랐다. 몸이 물에 뜰 수 있게 되면 발차기를 연습한다. 다리를 쭉 펴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을 준다.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도록 신경 쓰기. 그다음에는 팔. 순서에 따라 팔을 움직이고, 오른쪽 팔을 들 때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호흡한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은 다 ‘영’으로 끝나는데 왜 자유형만 ‘형’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레인을 한 바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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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가 귀뚜라미 소리로 변하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선선한 여름밤이 되면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같이 걸으면 사랑에 빠지는 계절.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계절. 이런 밤이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새벽 3시쯤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에 나가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다. 그렇게 누워 하늘을 보고 있자면 잘 만들어진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낮에는 나를 괴롭히고 위압적으로 다가왔던 것들도, 밤이 되어 다시 바라보면 조금은 작게 보인다. 건물도, 도로도, 전등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우리 손에 만들어진 것들을 우리가 겁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왜 만들어진 것들 속에서 불안에 떨며 살아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든.


나방과 하루살이가 가득 붙어있는 불빛 환한 편의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시원한 음료와 허기진 배를 달래줄 컵라면 하나를 사서 앉는다. 편의점 바깥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움직이자 땅에 긁히는 소리가 난다.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있잖아, 그거 알아? 나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그러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까. 뭐라고 할지 알고 있지만 애써 적지 않는다. 한쪽이 너무 얇게 뜯긴 나무젓가락으로 컵라면을 호로록호로록 비운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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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여름이다. 밤새 귓가에서 윙윙대는 모기 소리와 개구리라도 된 양 축축한 피부. 이런 날이면 잊고 있던 친구가 기억 속을 휘저으며 나타난다.


선풍기를 안고 바닥에 녹아내린 너는 끈적한 꿈처럼 느릿하게 말한다. 야, 이제는 한국도 열대야. 말보다 중얼거림에 가까웠던가. 요즘 여름은 눈 오면 끝난 다지. 엘니뇨와 라니냐가 대화하는 지점에서 이미 살 만한 곳은 사라진 거라고. 여름밤의 꿈이란 후덥지근한 거야. 이를테면 사막의 신기루 같은 거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것. 아, 차라리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더위가 잠을 훔쳐버린 밤, 아무래도 이건 밤이 아닌 것 같아 무더위를 떠들어대는 티브이를 툭하니 꺼버렸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헤매는 밤. 그곳에서 길을 잃은 너는 아마도 열대야를 견디지 못했던 걸까.


눈이 내린다. 잠든 너를 덮은 마지막 문장에 하얀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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