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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Jan 07. 2021

날아감

누구나 다 아는 식상하고도 식상한 바로 그 사정

열심히 막바지 문서작업 중이었다. 요것만 딱 저장하고 퇴근해야지.

하는데

왠지 알 것 같은 싸한 기분. 있잖은가? 바로 그거다.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고

모니터가 갑자기 까맣게 되는 매직. 그렇다. 전기가 나갔다. 내가 오늘 눈이 많이 와서 차를 밑에다 댔는데 모든 선생님들이 퇴근하신 줄 알고 행정실에서 전기를 내려버리신.. 것이다. 너무나도 식상한 스토리다. 내가 내손으로 날린 바보짓이면 억울하지는 않다. 다만 좀 더 화날 뿐. 세상에. 드라마에서 식상하다며 손가락질하는 그 스토리를 내가 겪으니

눈물을 좀 닦아야겠다.

간신히 의자에서 궁둥이를 떼고 머리 위로 푸시식 하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학교를 나오는데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웨오오오오오옹
텔레캅이 출동할 것 같아 간신히 계장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텔레캅 전화 왔었다며 나가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셨.. 그런데 전기는 누가 내렸... 영하 18도만큼이나 내 마음도 시리다.
어린이집으로 갔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꼬마의 재잘거림

나: 응 전기가 나갔어.
딸: 옹? 전기가 어디로 나갔는데?
나: 학교에서 나가서 집으로 갔어.
딸: 전기가 집으로 갔어?
나: 응. 엄마가 일한 거 다 들고 갔다?
딸: 엄마가 일한걸 왜 전기가 들고 가?
나: 그렇지 전기 나빴지?
딸: 전기 그거 불 들어오는 거잖아 사람 아닌데
나: 응 사람도 아닌 것이 엄마 꺼 가져 갔다.
딸: 엄마 이 거봐라~ 색칠한 거야~
(대충 대화가 끝났다는 뜻)


집으로 와서 사골국에 순대를 넣어 순댓국을 끓인다(사골국의 매력 편 참고). 그리고 잠시 남편과 꼬마와 따땃하게 몸을 녹이고.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 나와 남편 모두 재택 야근 시작. 남편은 내일모레. 나는 내일이 마감일이다. 문서가 날아간 건 내 사정이고 나는 내일 제출해야 한다. 오늘은 내가 방음부스를 쓴다. 꼬마는 오늘 갑자기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잠시 당황했다. 그림 그리면 두 시간은 평화로운데.. 그러면 계획표대로 하랬더니 후다닥 해버리고 오늘은 엄마 아빠 상태를 보아하니 시크릿 쥬쥬를 봐도 될 것 같았는지 서성거린다. 남편이 보라고 하고 꼬마는 야호! 를 외치며 60분으로 세팅된 너튜브 키즈를 신나게 봤다. 나는 계속 방에서 골반의 틀어짐을 느끼며 작업(퍼플 방석이 심하게 갖고 싶다 갖고 싶다) 했고 오른쪽 다리가 저려올 무렵 대충 다했다. 나머지는 내일 학교에서 마무리해야 한다.

밤 일곱 시부터 열 시 반까지 폭풍 야근을 마치고 내일은 또 우리 가족이 한파를 뚫고 어딜 좀 가야 해서(누구 만나러 가는 것 아임) 가방을 싸는데 자꾸 가져갈게 추가된다. 이것도 내일의 나에게 맡기 기로하고 대충 쌓아둔다. 요즘 민낯으로 다니는 게 목표라(놀랍게도 그동안 비비와 립스틱을 발랐던 것이었던 것이다) 클렌징을 하고 크림을 꾸덕꾸덕 바른다. 그리고 글쓰기 연습을 빙자한 이것만큼은 오늘의 내가 쓴다. 소파에 엎드려서. 그러니까 골반이 아프지.

암튼, 오후에 한 일 밤에 새로 싹 다시 한 기분은. 별로이므로 꼬마의 귀여운 발꼬락을 만지작거리다 자야겠다.

fin.

비행기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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