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낙서

립스틱으로. 베개에.

by 베로니카


모처럼 딸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다. 주로 나와 남편에게 이것저것 보여주며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나더러 쿨하게 씻으라는 거다. 보통 내가 씻기 시작하면 화장실 문 앞에서 이 얘기 저 얘기 계속하는데. 내가 나올 때까지 계속. 오늘따라 잠잠하다.


뭔가 수상한데?


그래도 크게 사고(?)를 치는 아이는 아니니까. 별 걱정 없이 씻고 옷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서는데




아이는 내 하나밖에 없는 립스틱을 황급히 자신의 보물상자에 숨겼다. 그리고 본인도 이불속으로 숨어버렸다. 사진 속 베개 두 개는 물론 이불 한 채, 바디필로우 하나에도 토끼며 고래며 온갖 귀여운 것들을 깜찍하게 그려놓았는데


뭐라고 할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그림이 낙서였다면 아이를 나무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무 귀여운 굿즈들이 되어버린 것을 어쩌나. 토끼와 고래와 공주님들이 저렇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나는 속으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꼬마야. 그림은 종이에 그려야지.


했더니, 꼬마가


엄마 립스틱 색깔이 너무 예뻐서 그만.

(요즘 콩순이며 시크릿 쥬쥬며 옥토넛 등의 말투가 다 짬뽕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고 큰 눈을 데굴거리며 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웃고는 이불속으로 쏙 숨어버린다. 나는 내일 나무라야지 하고 사진을 찍어두고 잠이 들었고, 다음날 남편이 이 그림들을 보더니 이미 웃음이 터져버린 나 대신 꼬마를 얌전히 타일렀다.


꼬마야. 엄마 립스틱 말고 다른 걸로 종이에만 그리는 거야.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깜찍하고 귀여운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우리 아이를 미술학원에 보내길 정말 잘했다고 말이다.


Fin.


기승전 딸내미지만 어떡하우. 나도 고슴도치 엄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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