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쓰는 일기 2026. 1. 9.
게으른 완벽주의자.
뭘 하든 완벽을 추구하기에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너무 잘하고 싶어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눈 앞에 보이는 것들 중 가장 비실한 목표를 데려오자.
눈 앞의 가장 만만한 놈을 쥐어 팰 시간이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by 태수 」중에서
그렇다. 나의 이야기다. 다른 이의 글 속에서 나의 마음을 만났다.
깨끗한 새 공책에 시 한편을 옮겨 적는다. 마음을 울리는 좋은 시들을 가득가득 모아서 맘껏 행복해해야지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런데 첫 장부터 글씨가 마음에 안든다. 한 페이지를 찢어내면 흔적이 남을텐데... 나는 그게 싫다. 다시 새 공책을 찾아내서 새로 옮겨적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잘못 쓴 공책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인생은 그렇지가 않다. 그런데 나의 성향은 어딜 가지 않는다. 무언가 하나가 틀어졌다. 나는 새 공책처럼 새 인생을 마련할 수가 없어 내내 찜찜하다. 인생의 어느 한 장에 잉크가 번졌다. 찢어낼 수 없는 한 시절때문에 뒷장으로 이어질 시절을 시작하지 못했다. 인생에도 리셋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잘못 쓴 글자를 담은 한 장을 찢어내지 못하여도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나는 나에게 합리화를 시작한다. 내 안의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나를 속이며. 이미 깨끗한 공책에 잉크가 번졌는데 직장에서 승진하는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나는 원래 승진 따위에 관심이 없다고 나를 속인다. 예쁘고 멋지게 꾸민들 무엇하겠나 싶었다. 낡은 신발과 가방으로 나를 속인다. 나는 원래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포도송이마냥 내 무위에는 이유가 하나씩 붙었다. 그런 마음으로 이십 년을 보냈다. 나는 완벽하게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살았다.
그런데 지난 여름, 그 무섭도록 뜨거운 여름이라 그랬던걸까. 내 안에 숨겨뒀던 젊었던 내가 깨어나 나에게 속삭였다. 이제 다시 시작해보라고. 버려뒀던 나를 들여다보라고, 그리고 나를 안아주라고. 눈물이 났다.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하는걸까. 그 여름에 흐르던 눈물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저앉아 세월에 나를 흘려보내지 말라고.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고.
그래서 버려뒀던 나를 찾으러 혼자 여행을 떠나보았다.
잠자던 그 아이가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그 바글거리는 말들을 덜어내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잉크가 번지던 그 시절 풍경에 멈춰있던 내가 새로운 노래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어제, 먼지쌓인 책장을 들여다 보았다.
오랜 세월 욕심껏 모아둔 책꽂이의 책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침대 머리맡에 좋아하는 시집들을 꽂아두었다.
자다가 깨어 노오란 전등을 켜고 시 두어 편을 읽었다.
책 한권을 읽으며 문장을 옮겨보기로 마음 먹었다.
역시나 글씨가 마음에 안들어도 참아보기로 하면서.
찢어내는 일도, 새 공책을 구하는 일도 나의 작은 시작을 방해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태수 작가의 한 문장처럼, 눈 앞의 가장 만만한 놈을 쥐어팰 시간이 나에게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