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손길 하나

혼자 쓰는 일기 2026. 1. 10.

by 봄비

나는 유난히 소리에 예민하다. 소리에 예민하여 절대음감을 갖는다던가, 저마다 다른 색깔의 숲 속 새소리를 구별해내는 그런 재능이었다면 좋았을테지만. 그저 특정한 소음들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미소포니아의 까칠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쩝쩝거리며 음식을 씹는 소리, 볼펜을 딸각거리는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


특히 모두가 함께 있는 곳에서 자기의 이야기가 다 들리도록 떠드는 것을 못견뎌낸다. 엘리베이터에서 통화를 이어가는 사람.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 사람의 근황을 듣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의 결혼 준비 상황까지다 듣고야 만다.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거나 웃어제끼는 사람들을 또 참아내지 못한다. 술자리여도 참고 싶지 않다. 내 일행이 술자리에서 크게 떠들면 나는 어김없이 제지시키고야 만다. 화가 많아서 그런 것일까, 소리에 민감해서 그런 것일까.


도서관에서 일도 하고 책도 읽고 있는 요즘. 집 놔두고 도서관으로 향한 이유도 소리 때문이다. 집에서의 일상소음 속에서 도망을 친다. 그런데 애써 도망 온 도서관에서 난적을 만났다. 6명이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앞자리에 엄마와 자녀 2명이 앉았다. 문제집 하나를 펼쳐놓고 엄마는 아이를 다그친다. 엄마가 내준 숙제를 했는지 검사를 하고, 잔소리를 하고, 틀린 문제를 가르쳐 준다. 나는 교사다. 공부를 가르치는 게 내 일이다. 하지만 여긴 아니지 않는가. 모두가 기침 소리도 조심하는 도서관에서 왜 하필 내 앞자리에 앉아 내 신경을 긁어대는가 이 말이다. 화가 났다. 평화로운 토요일,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맘껏 행복해지고 싶은데 앞자리 엄마 때문에 내 평화가 깨졌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가을 숲에서 만나는 풀벌레계의 고유진 소리, 숲 속 산사에서 만나는 은은한 풍경소리,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는 도마 소리. 나는 이런 소리가 좋단 말이다.


결국 참다참다 조용히 좀 해달라 부탁을 했다. 알겠다고 대답하던 그 가족은 5분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떠났다. 조금은 비겁하고, 많이 소심한 나다.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는 것은 화가 엄청 났다는 것이며 또 엄청나게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그럭저럭 도서관에서 신선놀음을 하다 문을 나섰다. 다 읽지도 않을 책들을 여러 권 챙겨넣은 가방이 무거웠다. 도서관 큰 유리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두어 발자국 앞에 검정색 패팅을 입은 남자 아이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중학교 2-3학년 정도 되었을까? 앞서 걷던 그 아이는 유리문을 열고 나가더니 내가 두 세 걸음 더 걸어오도록 유리문을 잡고 있었다. 마음에 바람이 한 점 불어온다. 봄바람처럼 따뜻한 한 줄기 바람이. 나도 모르게 그 소년에게 존댓말을 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라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피식 웃음이 났다. 어지간히 그 손길이 예뻤나보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존댓말까지 하다니 싶어서.


한창 사춘기일지 모를 그 남자 아이의 가벼운 손짓이 나를 또 슬그머니 후회하게 하였다. 아이 두 명과 함께였는데 내가 건넨 말 한마디로 그 엄마는 무안했을까.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서 그저 흐뭇하게 보고 넘겼으면 어땠을까.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던 나의 표정은 부드러웠을까.


검정 패딩 소년의 다정한 손길 하나가 반백년 굳어진 내 마음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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