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쓰는 일기 2026. 2. 14.
그때는 내가 제정신 차리고 살았었나 보았다. 책 속지에 "1993. 사랑하는 엄마께" 라고 적어놓은 걸 보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지금. 새삼스럽게 법정스님의 글귀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스님의 책들이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고 욕심 많은 나는 갑자기 절망스러웠다. 그 옛날 읽었던 법정스님의 책을 책꽂이에서 뒤져 찾아냈다. 많이도 다시 읽고 다시 읽었는지 다 헤어져 버린 책을. 아쉬운 마음에 이리저리 법정스님의 흔적을 좇다 보니 92년-93년 언저리에 그분은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우러 적막을 찾아 들어가셨을까. 그리고 그 무렵, 고3이었던 나는 무엇을 버리고 싶어서 이 책을 샀을까.
법정스님의 모든 책들을 내 책꽂이에 꽂아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는 그분의 말씀들을 죄다 허투루 읽은 것이겠지. 못다 이룬 내 물욕이 아쉽고 아쉬워 스님의 흔적이라도 만나려고 언니와 길상사를 찾아 나섰다. 모처럼 봄바람처럼 훈풍이 부는 날이다. 꽃피는 봄에 가야 하지 않을까 잠시 주춤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늘 지금을 살으라는 스님 법문처럼 오늘은 또 오늘대로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스며있겠지.
그렇다. 정말 지금의 계절만큼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파리 다 떨구어낸 텅 빈 가지 끝마다 봄의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고, 욕심과 후회로 뒤범벅이던 내 마음은 늦은 겨울의 고즈넉한 설렘이 스며들어 차분하게 정돈되고 있었다.
예전에도 엄마랑 이곳에 왔었지만 마음을 담고 가지 않아서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종교의 벽을 넘나들어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은 예전에도 그곳에 계셨을 테지만 나는 이번에 관음보살상을 처음 만났다. 스님이 머물렀다는 진영각의 풍경風磬도, 누군가에게 쉬어가는 발걸음 되라고 놓여있는 돌탁자와 의자도 모두 법정스님의 목소리로 다가왔다.
무심히 흘려보냈던 시간들. 그 시간에도 법정스님은 늘 한겨울 서리 같은 깨달음의 글들을 쓰고 계셨을 텐데. 법정 스님의 글에 마음 흔들렸던 어린 나는 왜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며 사는 선택을 했을까. 동시대에 큰 어른과 같이 살아가는 그 복을 모르고 지나간 뒤에 흔적을 좇고 있는 어리석음에 마음 한구석에 찬바람이 불어온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상사를 뒤로 하고 나오는 순간, 법정스님의 '붓장난전'이란 현수막이 보였다. 스님의 친필 편지와 글귀들, 손수 만드신 빠삐용 의자, 스님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님의 책들을 소유할 수 없어서 억울했던 내 물욕이 스님의 글귀 앞에서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고운 색의 한지 하나를 골라 누군가를 떠올리며 붓을 들었을 그분의 정갈하고 다정한 시간들이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 나는 욕심 많은 사람일 뿐. 작은 화선지 하나에 담긴 스님의 마음을 받았던 사람들을 또 부러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길상사를 방문한건 지난 2월. 일기를 써놓고도 게으름을 부렸다.
오늘.
깨어진 일상은 아무일 없는 시간들의 소중함을 또 한 번 새삼스레 일깨운다. 마음을 추스리려 서점을 찾았다.
내 발걸음이 왜 그리로 향했을까. 큰어른의 죽비로 나의 시간과 마음을 경계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난 또 절제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야 만다. 법정스님의 흔적이 담긴 책들을 욕심껏 골랐다. 마치 스님의 글귀와 흔적들이 나를 회복시켜 줄거라 믿는 듯이. 그렇게 나의 욕심은 이어졌다.
책장을 펼치다 잊고 있었던 2월의 일기가 떠올라 그날의 충만하고도 소박했던 행복을 다시 가늠하며 일기를 다듬는다.
봄이 부지런히 오고 있다.
봄은 모두에게 오고 있다.
이 착한 봄을 누리는 기쁨은
각자의 마음 그릇에 따른다.
깨어졌다 생각한 내 그릇을
보듬어 보려고
봄처럼 부지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