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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이 필요한 나...

숨어들 동굴이 필요한 한 여자의 절절하고 비밀스러운 외침

by 봄비

자기만의 동굴이 필요하다고 하는 남자들. 난 남자도 아니다. 그보다 더, 난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그저 나는 동굴이 필요한 여자다. 동굴은 꼭 남자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


어울리며 살아서 외롭지 않은 세상이지만 또 그 넓은 세상 속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에 또 외롭기도 한 세상이다.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사실. 거기에 나의 유별난 성향이 더해져 나는 나만의 동굴이 절실히 필요했다.


혼자선 살 수 없는 세상.

내 안에 다양한 얼굴이 있다. 다중인격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관계와 역할에 따라,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사회화된 다양한 얼굴이 나에게도 존재한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집에서처럼 세상 잘난 척 우쭐대는 얼굴로 직장생활을 한다면? 상황에 맞는 얼굴로 변신할 줄 모르면 원만히 세상 살기 어렵다. 하지만 변신 상태에서도 숨겨둔 본질적 내가 불쑥불쑥 꿈틀거리는 게 문제다. 세상 속에 사는 모두가 이렇듯 다중역할을 맡고 살고 있겠지. 하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조절하는 각자의 성향은 모두 다르다. 잘 해내고 싶은 나의 욕구와 기본적인 나의 성향이 번번이 충돌하여 시시때때로 동굴이 필요한 나.


동굴이 필요한 순간들.

업무 회의를 한다. 각 부서에서 업무를 떠민다. 나름의 논리를 들이대며 각자의 입장을 주장한다. 모두 안 하겠다면 소는 누가 키운다는 것인가. 누군가는 해야 할 일. 나는 이 일의 조정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 회의가 끝나면 또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직장동료인데, 이 순간에는 모두들 날을 세우고 각자의 입장만을 이야기한다. 서로 한 발자국 양보하지도 않고, 서로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않는다. 누구한테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얼굴을 붉히지 않고도 상대를 꼭꼭 찌르는 듯한 말을 잘도 한다. 이 회의가 끝나고 어떤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려고 저럴까. 많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에 떠다닌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난 나의 사회적 역할을 해내야 한다. 치우치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일은 성사되도록 온 신경을 쏟는다. 말 한마디 한마디, 단어 선택 하나도 조심스럽다. 나는 회의를 끝내고 내 공간으로 돌아와 동굴을 찾는다.


회의가 끝나고 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때로는 동굴이 필요한 시간이 되어도 동굴로 기어들어가지 못하고 회식이라는 또 하나의 난관에 직면한다. 언제 서로 일을 미루고, 언제 서로를 공격했었던가. 웃는 얼굴로 고기를 굽고 서로 권하며 웃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나도 머릿속에 자라고 있는 말들을 감춘 채 누군가에게 술을 따러준다. 어떤 일을 들먹거리며 참 고마웠다고 말한다. 정말 고마웠을까 나는.. 또 내 머릿속에 많은 말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그들도 나도... 우리에게 모두 가증스럽다는 표현이 적합할까. 머릿속이 터질 만큼 말들이 자라서 정말 이젠 못 참겠다 할 무렵, 누군가가 또 찻집에서의 2차를 제안한다. 아... 술 먹다 또 무슨 찻집인가... 모두들 가는데 나만 안 갈 수가 없는데. 동굴 속에서 잠수를 타든, 대나무숲에서 소리를 지르든 무언가를 해야 할 타이밍인데. 해소하지 못한 것들을 마음에 담고 또 다음 날을 맞이한다.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지 못한 채 이어지는 한 주는 너무 힘겹다.


툭 내던진 무심한 말, 전해진 뒷담화, 근거 없는 오해.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 상할 일들이 생긴다. 업무량이 많거나 복잡해도 그런 성격의 일은 또 해결해 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들은 시간과 노력만 투자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다. 툭 내던진 무심한 말. 다 큰 성인들이 아이처럼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대놓고 묻지도 못한다. 전해 들은 뒷담화. 나에게 뒷담화를 전한 사람 입장을 생각하니 화도 낼 수 없다. 근거 없는 오해. 이미 생긴 오해는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껄끄러운 관계를 만든다. 복잡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온다. 하지만 복잡한 표정으로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다. 애써 평소처럼 웃으며 실없는 농담도 하고 떠들다 방문을 닫는다. 그제야 가면을 벗고 맘껏 우울해한다. 하지만 집도 완전한 동굴이 되어주진 못한다. 가족이라는 사회생활의 일부니까.


오랜만에 서로의 편이 되어줄 반가운 사람들과 만난다. 그간 쌓인 각자의 이야기들. 한 사람이 줄곧 자신의 하소연을 이어간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누군가 말을 끊어도 용케도 다시 잽싸게 자신의 이야기로 연결 짓는다. 어떻게 주구장창 자기 얘기만 할 수 있을까. 돌아가며 1분 발언권을 줄 수도 없는 노릇. 때론 공유하지 못할 소수만의 화제가 길어진다. 나는 모르는 저 먼 사람들의 이야기. 공허해진다. 당신의 사돈의 팔촌 이야기를 들어주러 나는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야. 지루한 이야기로 대화는 분산되고 나는 어떤 대화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다 애써 내 발언권을 차지하여 힘들었던 내 이야기를 슬쩍 꺼낸다. 그런데 '너는 강하잖아', '너는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야' 누군가 나를 응원하는 말을 한다. 난 강한 사람이 아니야, 나도 상황에, 무심한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야. 하지만 고마운 믿음과 응원 앞에서 나는 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아 멋쩍게 입을 다문다. 그럭저럭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시간. 주식 때문에, 아이 유학 비용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쪼들린다고 말하던 사람. 본인이 만나자 해놓고도 계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항상 내가 계산을 하고 정확히 1/N으로 정산을 한다. 늘 입금이 늦다. 독촉하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또 피곤하다. 나는 또 한동안 어떤 모임도 나가고 싶지 않다.


교육의 효과는 대단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주장이 강하고 호불호도 강했다. 내가 납득할 이유가 있어야 받아들이는 고집 센 또는 주관 있는 아이였다. 나의 이런 성향을 걱정한 나의 부모님은 항상 내가 좀 더 두루두루 살필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자라길 기대했다. 딸이 모난 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 고집 센 나도 그 마음을 너무나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이렇게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 고집과 나름의 주관은 저 밑에 숨겨둔 채 모든 관계에 원만해 보이는 사람. 그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노력한다. 성과도 있고 인정도 받는다. 하지만 기가 다 빨리는 기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핸드폰 배터리 충전하듯, 나는 동굴 속에서 배터리 충전을 해야 한다


MBTI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한 때 유행하다가 지나갈 거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MBTI가 참 애매하게 와닿고, 애매하게 마음에 안 든다. 그놈의 MBTI에 따르면 나는 모든 상황과 사람을 잘 아우르고 수습하고 해결하는 '지지자', '옹호자'라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노력하고 살고 있으니 내가 그렇게 응답했겠지. 그런데 그렇게 보이도록 모든 상황을 수습한 뒤 나에게는 동굴이 응급실처럼 너무나 필요하다는 얘기를 왜 그 MBTI에서는 얘기를 안 해줄까.


넓은 세상 속에 두 명일 수 없는 나.

나는 18살에 인생이 외롭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기말고사 기간에 너무 심하게 감기몸살을 앓던 어느 날. 욕심 많은 나는 시험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열은 펄펄 끓고, 온몸이 덜덜 떨리며 오한이 들었지만 악착같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다. 딸이 걱정되고 안쓰러운 엄마는 내 방에서 나와 함께 그 시간을 겪어주고 싶다. 나는 아직도 더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새벽까지 공부하는 아픈 딸이 외롭지 않게 함께 깨어 책을 읽던 엄마.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는지 살짝 코를 골며 스르르 잠이 든 엄마. 뒤돌아 엄마를 본다. 아.. 인생이 참 외로운 거구나 싶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딸을 걱정하는 엄마지만 아픈 딸을 위해 공부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내 몫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이없는 장면에서 인생의 외로움을 느껴버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또 한 명이 있다면 어떨까. 공감의 힘에 대한 글을 잠시 빌려온다.


"공감은 그 자체로 치유 인자이다. 공감은 최악의 상황에 빠진 내담자조차 그가 처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고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인류 집단 속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치유의 핵심적인 수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데이비드 호우의 「공감의 힘」 중에서>


더운 여름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공감. 문제는 잠시 더위를 잊게 해 줄 한줄기 바람일 뿐 바람은 계속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완벽하게 나를 공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나는 이미 18세에 깨닫지 않았나. 사랑하는 연인끼리의 '자기'라는 호칭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상대를 자기라고 표현하는 것. 나와 같은 사람 한 명이 더 있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자기'라고 불렀던 사람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이별도 해본 나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안아줄 수 없어서 엄마를 세상에 존재하게 했다는 이야기. 그래, 그런데도 우리 엄마도 아픈 나를 대신하여 공부해 줄 순 없잖아.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다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혼자 기어들어갈 동굴 하나 마련하는 것. 나의 동굴은 건강하다. 우울함에 빠져 누군가를 걱정시키는 동굴이 아니다. 공감이란 치유 인자를 통해 다시 인류 집단 속으로 복귀하게 된다고 하듯, 동굴에서의 시간을 통해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충천한다. 다시 건강하게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잠시 동굴을 빌리는 것.


밭에서의 호미질로 머리를 비운다. 소중한 이 식물들. 정직하게 그들이 원하는 조건만 맞춰주면 무한한 것들을 내어주는 식물들을 사랑하는 나. 아이들과 함께 백일홍과 해바라기 씨앗을 심는다. 쏙쏙 머리를 내민 새싹을 옮겨 심을 건강한 땅을 만들어야 한다. 호미질을 한다. 또 쉴 새 없이 자라는 잡초들을 뽑으려면 생각할 겨를이 없다. 게다가 유난히 잡초들은 뿌리도 깊다. 호미질이 필요하다. 앵두나무를 심으려고 땅을 깊숙이 판다. 삽질 두어 번 하면 될 일. 하지만 나는 그냥 호미질을 한다. 넓고 깊게, 아주 오랫동안. 거름을 뿌리고 호미질, 물 흐르는 길을 만들려고 또 호미질을 한다. 외국인들도 감탄한다는 한국의 그 호미. 나는 호미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호미질을 하는 동안 나는 머리를 비우고 다시 건강해진다.


테니스 난타를 치며 잡념을 날린다. 테니스 게임이 아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신경전이 필요한 게임은 나에겐 전혀 맞지 않는 일. 그저 서로 공을 주고받는 난타가 나에겐 제격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보낸 볼을 나도 상대에게 잘 보내주어야 한다. 공만 보고 뛰어다닌다. 테니스공이 라켓에 맞을 때 나는 그 소리. 나는 그 소리를 즐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한 박자의 그 소리를 즐긴다. 일정한 박자로 그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난타가 서로 유연하게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 심장 박동이 일정해야 하는 것처럼 그 소리도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그러려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나는 일정한 박자의 그 소리도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나를 멀리서 바라본다. 나는 가끔 농담처럼 말한다. 우리 집 벽에 데스노트를 쓰고 있다고. 내 방 벽에 너의 이름이 엄청 많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농담을 빙자하여 내 속마음을 그렇게라도 말한다, 비겁하게.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은 가끔은 데스노트를 쓰는 것처럼 통쾌하기도 하다. 내 글의 주인공은 나. 내 입장을 더 부각시키며 글을 쓴다. 슬쩍 공감을 구해본다. '좋아요', '구독' 뭐 이런 것들이 사실 다 공감받고 싶은 심리를 바탕으로 유행하게 된 현상이 아닐까. 때로는 남들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낱낱이 떠올리며 글을 쓴다. 그러다 유치하거나 옹졸한 나의 속내를 발견한다. 그래, 그럴 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나를 되돌아본다. 그렇게 까지 니가 스트레스받을 일이 아닌데... 니가 너무 과한 거야.. 스스로 깨닫게 되는 시간. 마음이 가지런히 정돈되는 느낌.


혼자 하는 드라이브로 세상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한다. 사실상 내 동굴이라 말할 수 있는 공간은 내 차다. 나의 방도 아닌 내 차.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내 차를 타고 그저 어디론가 떠난다. 멀지 않은 곳, 강이 있는 곳, 꽃이 예쁜 곳, 오솔길 끝이 궁금해지는 곳. 신호등의 장애 없이 달릴 수 있는 국도를 따르다 만나는 그곳. 음악을 크게 틀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낀다.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들에 집중하고 상상을 한다. 저 오솔길을 따라가면 어떤 풍경이 있을까. 저 빛바랜 빨간 지붕 집에는 허리가 꼬부라진 노부부가 살까. 산 아래 정다워 보이는 저 동네 사람들은 비가 오면 서로 부침개를 나눠 먹을까. 어둑어둑 시골길에 불 켜진 저 집 사람들은 어떤 소박한 밥상을 차려놓고 있을까. 아무도 없이 적막한 도로를 걷고 있는 저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도 예쁜 소녀시절이 있었겠지. 그저 소박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하며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겠지.. 나도 그렇듯. 그들의 허락도 없이 동질감을 느끼며 세상에 소속된 나를 느낀다.


가족들과의 막걸리 시간. 나를 되돌아본다. 엄마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 아빠와 오빠와 나. 막걸리잔 세 개를 놓고 저녁을 먹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가장 잘 알고 또 그저 내 편일 수밖에 없는 나의 가족들과의 저녁 시간. 이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나의 동굴이다.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은 나의 표정이 있는 날에도 막걸리는 나의 가면이 되어준다. 막걸리를 먹다 내놓은 하소연. 무조건 내 편인 아빠. 딸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건설적 방향을 조언해 주는 엄마. 문제는 극 T 성향의 오빠다. 오빠는 항상 나의 행태를 낱낱이 분석하고 잘잘못을 가려낸다. 오빠의 말에 화가 난다. 하지만 결국 그 저녁 식사의 끝에는 나도 내 성찰을 하고 있다. 참 건설적인 동굴이다.


성공한 'I'에게도 동굴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그 MBTI의 'I' 성향이라는 걸 상상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 앞에서 회의나 연수를 주관하고 진행하기도 하는 나. 모임의 총무를 맡기도 하고, 장난도 농담도 곧잘 하고 웃고 떠드는 나. 그 속에 이런 음흉한 또 다른 내가 숨어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하는 듯하다. 이걸 어디 현수막을 붙여서 말해줘야 하나 어떡하나. 그런데 어떤 한 사람, 나를 '성공한 I '라고 표현했다. 외적인 나의 역할 수행과 반대되는 내적인 나의 고뇌를 잘 표현한 용어, '성공한 I'. 나를 표현한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하여튼 결론.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그 세상 속에 혼자 뿐인 나. 게다가 유난히 예민하고 까칠한 나의 성향. 세 박자가 척척 맞으니 나 같은 '성공한 I '에게는 꼭 동굴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글은 어쩌면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현수막일지도. 때때로 나타나는 나의 일탈적 행동을 이해받고 싶어서 내건 현수막. 피로한 회의 끝에 이어지는 회식자리에 가고 싶지 않은 나를 이해해 달라는 하소연.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도 길거나 잦으면 기가 다 빨리는 나를 이해해 달라는 하소연.


느닷없이 혼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한다면 같이 도와준다고 말하지 말아 주시길.

난타만 치고 집으로 가는 나에게 테니스 게임을 제안하시는 많은 분들, 저는 괜찮습니다. 네네..

갑자기 회식 중 말이 없어진 저를 발견한다면 저 몰래 2차 가셔도 절대로 서운하지 않습니다. 네네...

그렇게 도와주신다면 또 내일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떠드는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는 오늘 대나무 숲에서 나의 비밀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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