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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찰랑... 넘치지 않는 소주 한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일상을 소망하며

by 봄비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치 못함과 같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상태.

소주잔에 적당량의 술을 따라야 술자리에서도 사랑받더라.


너무 할 일이 없으면 무료와 권태에 빠지고

할 일이 밀리면 스트레스와 번아웃에 빠진다.

너무 잘 나면 범접할 수 없는 그 경계에 다가가기 어렵고

너무 못나면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갈 힘이 없다.

봄비가 적당히 내리면 세상은 살만해지고

봄비가 과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겠지.


이렇게 찰랑찰랑. 넘치지 않는 적절한 선을 지키며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한동안 나는 내 마음을 너무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 별일 없기만을 바라며 내 앞에 펼쳐지는 일상을 겪어내기만 했다. 내일, 그 며칠 후, 10년 후...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기 두려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두려워 일기조차 쓰고 싶지 않았던... 그저 오늘 하루만 내 마음이 잔잔하길 소망하던 시간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들. 그래 아무 일도 없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다행이며 행복인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20년을 살아내고 나니 내 안에서 용기라는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덮어두고 싶었던 시간들을 대면할 용기가. 자신 있었다. 난 지난 시간과 대면하는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지금의 나. 이 여행 이후의 나는 온종일 내 마음속만 들여다보고 있다. 내 안에서 위험 경고가 작동할 만큼. 지난 모든 순간순간들을 한꺼번에 소환해 낸다. 그동안 회피했던 생각과 말들이 자생력을 가진 듯 마음속에 자꾸만 자라서 넘쳐난다. 좋은 말이 넘치면 웃음이겠지만 반대의 경우엔 눈물이 되겠지. 말이 넘쳐 눈물이 될까 봐 그걸 다 글로 덜어내고 있다. 여행 후 8일째, 하루 온종일. 마감시간에 쫓기는 작가처럼. 과하다.


학창 시절에 누구든 한 번씩 좋아하는 연예인 한 명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일부러 거리를 뒀다. 내가 좋아하면 너무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나는 나를 너무도 잘 알았던 청소년이었다. 애살 많은 내 성격에 무언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혼자 떠났던 이번 여행 이후 이 나이의 내가, 이제야 한 가수에 빠져든다. 여행 내내 내 차 안에 같이 있었던 고유진. 나랑 같이 여행을 한 것 같은 고유진. 이런 일 저런 일.. 지난 시간들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너무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내 마음이 넘칠 듯 출렁였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다시 고유진의 노래를 들었다. 그냥 그 목소리에 집중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 목소리에 위로받았다. 여행 후 글을 쓰는 시간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유진의 노래만 듣고 있다. 과하다. 왜 적당히가 안되니.


돋보기를 들이대고 마음을 들여다본다. 마음속에 넘쳐나는 말들을 마구 기록해 댄다. 그러다 보면 자체 위험 경고가 발동된다. 그러면 슬쩍 도망을 간다. 고유진의 노래 속으로. 요즘의 나.


그저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처럼 추억도 그렇게 떠올리며 마음 촉촉해지면 그만일 텐데. 아픈 지구가 쏟아내는 요즈음의 폭우처럼 예상치 못할 만큼의 강수량의 비가 내 마음에 쏟아진다. 폭우는 둑을 무너뜨리고 일상을 잡아먹을 텐데.. 미쳤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다. 30대의 어느 날 그때도 마음이 폭풍우 속 바다처럼 넘실대고 출렁였다. 그 시절 유행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이 글을 썼었다.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싶은 마음을. 20년이 지난 지금 또 이 넘칠 듯 넘치지 않는 찰랑찰랑의 묘미를 소환해 낸다.


너무 예뻐서 지나가던 사람이 뒤돌아볼 만큼 아니라
그저 인상 좋고 기분 좋은 느낌의 얼굴.
미스코리아 뺨치는 기럭지 말고
우리 아빠 말대로 5cm가 부족한 기럭지.
너무 똑똑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재능 말고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정도로.
선한 영향력으로 뉴스에 나올 만큼 말고
호구처럼 보일 만큼 내 것 다 퍼주는 오지랖 말고
그저 주변사람에게 민폐끼지지 않고 배려하는 정도만.
통찰력과 필력으로 노벨상 받는 한강 작가처럼 말고
그저 이런 잡다구레한 생각에도 몇몇 사람 공감 얻을 글을 쓰는.
고유진을 좋아해도 일상을 잡아먹지 않을 만큼
지난 시간 추억해도 담담히 바라보며 울지 않을 만큼
그렇게 적당히 찰랑찰랑 따라진 소주처럼넘치지 않게 살고 싶다.
넘치지 않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넘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적고 있던

30대 그날처럼

오늘도 넘치지 않고 싶어서 다시 이 글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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