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과 햇콩

가을의 선물

by 차진호

음식점을 시작한 지 어느새 20년이 되었습니다. 20년간 식당을 운영하면서 체득하게 된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사계절 중에서 봄 여름은 장사가 잘되고 가을 겨울은 그보다 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뜨거운 음식이든 차가운 음식이든 봄 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장사가 잘되는 식당은 거의 없다 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되는 봄 여름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입니다. 봄과 여름은 돈 벌기는 좋은 계절이지만 일하기는 더 힘들기 때문인데 특히 여름은 좋은 매출이라는 영양주사를 맞으면서 매년 겨우겨우 버텨내는 기분입니다.


보통 가을은 추석을 지나고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햅쌀과 해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황홀감을 주는 빨강 노랑의 풍경과 청량감을 주는 푸른색 하늘의 공기도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햅쌀을 가지고 밥을 지을 때 시원한 공기 속에 스며드는 구수한 밥 냄새가 주는 매력은 무엇보다 강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00여 품종의 쌀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수많은 품종만큼 지역마다 다양한 브랜드가 있기도 하고 그중에는 분명 더 좋은 품종이 있고, 유명한 브랜드로 알려져서 비싼 가격에 팔리는 쌀과 그렇지 못한 쌀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햅쌀은 어떤 품종이든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었든 상관없이 맛이 좋습니다. 사실 모든 품종의 쌀을 다 써본 것은 아니고 20년 식당을 하면서 서너 종류의 품종과 지역을 비교해 가면서 사용해 보았고 될 수 있으면 가격이 비싸도 더 좋은 브랜드를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게 홍보도 되기 때문인데 아무리 비싸고 좋은 브랜드의 쌀이라도 햅쌀이 나오기 직전의 묵은쌀은 밥맛이 떨어졌습니다.


식당운영 20년 중에서 17년간 두부 전문점을 하였는데 그중에서 15년 정도 명절과 여름휴가를 제외하고 아침에 두부를 직접 제조하였습니다. 콩은 정말 예민한 작물입니다. 그래서 두부도 예민합니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평소 둔감한 성격인 저도 두부를 만들 때 만큼은 예민해집니다. 계절의 온도에 따라서 콩을 불리는 시간이 달라야 하고 콩물을 응고시키는 간수를 넣을 때는 간수의 염도가 정확해야 하며 간수를 넣고 콩물과 간수가 잘 섞이도록 저어줄 때는 정말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너무 단단하지도 너무 물컹하지도 않은 식감의 두부를 잘 뽑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민한 콩이지만 해콩으로 두부를 할 때면 늘 똑같이 했을 뿐인데도 스스로 더 큰 고소함을 만들어내고 더 없이 하얀색을 띠며 매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두부의 자태를 보면서 예민함은 누그러들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밥과 두부를 만들기 위해서 공통적으로 하는 것이 쌀과 콩을 잘 씻어서 물에 적당하게 불려주어야 합니다. 햅쌀은 쌀알이 투명하고 해콩은 선명한 노란색을 띠고 물에 씻을 때 몇 번 행구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한 상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밥이 되고 두부가 만들어지면 뽀얗고 하얀 살을 드러내고 윤기란 이런 것이다 라고, 밥맛과 두부맛은 원래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해 줍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닙니다. 장사가 한참 잘 되기 시작하는 여름에는 사실 햅쌀의 느낌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찹쌀도 좀 섞어주고 물도 좀 더 부어 밥을 지어야 합니다. 두부는 더욱 예민해져서 약간의 실수에도 비뚤어져 버립니다.


어디서 태어났든지 그 존재만으로도 선명한 자태와 본연의 맛을 최고로 보여주는 햅쌀과 해콩의 시간은 길지는 않지만 강렬해서 매년 이맘때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제 시작인 이 시간을 맘껏 즐기고자 합니다. 맛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재료로 만족스러운 음식을 내었을 때는 손님에게 평가를 받기도 전부터 만드는 과정에서 행복합니다. 비록 저는 묵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지만 매년 만나는 햅쌀과 해콩이 주는 즐거움으로 한 번씩 새 사람이 되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