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는 것은 맞았던 것일까
탄생의 종착점
실험은 끝났고 원폭은 과학자들의 손을 떠났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원폭이었으나 그건 방식의 차이일뿐 터지고 난 뒤에는 둘 모두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재앙에 다름 아니었다. 다만 이전의 재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사람의 의지로 작동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렇게 재앙과 다름없는 폭탄 두 덩어리가 모두 일본 본토에 떨어졌고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흔적을 지면에 새겨놓았다.
원자. 쪼개지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그 원자가 쪼개지자 에너지가 나왔고, 그게 폭탄의 원료가 되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작은 원자핵이었지만 막상 폭탄이 터지자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순간이었다. 그간 단단하다 여기던 모든 것들이 무력하게 녹아내렸고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생명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전쟁의 향배는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일본은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도 같이 죽자며 절대 꺼낼 수 없다던 가슴속 백기를 기어이 끄집어내게 만든 것은 바로 원폭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리틀 보이와 팻 맨은 미국의 강대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일본은 그렇게 항복했다. 태평양 건너에선 환호성이 넘쳤다. 특히 실험을 이끌었던 곳에선 또다른 의미의 환호성이었으리라. 그 모든 것을 현실화시킨 주체이자 주역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한가운데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환호가 터졌지만 자아는 분열되었다.
사람들의 기립박수와 환호는 냄비속 끓어오르는 물처럼 뜨거웠다. 홀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치려는 중이었다. 그런 냄비 안으로 뛰어들면서 차가워지길 기대할 수 있을까... 결국 오펜하이머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자신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위기와 압력에 동조하는 진동수였다. 같은 진동수는 증폭을 일으킨다. 오펜하이머의 연설을 통해 홀은 터져버리기 직전까지 부풀어 올랐다. 이미 임계질량을 채운 홀이었고 임계점 돌파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뭔가 하나만 더 던졌다면 사람들 모두 흥분에 못이겨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더라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으리라.
다만 터지기 직전인 상황은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주변 환경만은 아니었다. 그의 내면도 그러했다. 외부의 압력이 강하면 자연스럽게 내부는 쪼그라드는 법. 오펜하이머의 입은 외부와 공명했으나 그의 내면을 채우는 또다른 목소리는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속에서만 헛돌고 있었다. 눌려지는 스프링에 더 많은 힘이 쌓이듯 억눌리는 양심은 더 강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감독은 트리니티 실험의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멋지게 구현해냈던 것처럼 오펜하이머의 내면이 터지듯 분열하는 순간 역시 그렇게 스크린 앞에 감각적으로 펼쳐내고 있었다. 우리가 알듯 인상주의 화가들은 반짝이는 빛의 찰나를 기록하고 싶어했다. 감독은 분열하는 자아에 강렬한 빛을 비추고 그들의 화폭을 모방해 스크린에 옮기고 있었다. 귀보단 가슴을 두드리는 음향, 눈앞에 펼쳐지는 인상적인 화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배우의 붓질까지 더해져 나 역시 오펜하이머 내면의 분열에 같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아직 깊이감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분열의 한가운데가 생각만큼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문회라는 거울, 나에게 대답해야만 했다.
청문회의 대상자 입장에서 본다면 청문회란 남들이 나를 검증하는 시간이다. 당연하겠지만 자신에 대해서 의심의 질문과 의혹의 눈길이 쏟아지고, 더 나아가 내 발을 함정에 빠트리고자 하는 교활한 책략이 난무하는 곳이니 견고하게 가드를 올리고 신중하게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스탠스는 조금 달랐다. 그다지 방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애써 변론으로 덮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와이프 캐서린의 지적처럼 분명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어쩌면 오펜하이머에게 있어 그 자리에서 진정 설득해야 했었던 대상은 청문회장을 채우고 있던 이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이들이 나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딱지를 붙일 수는 있다. 하지만 나의 양심에 대해서는? 양심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었다.
우리도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나. 지난달 지출내역을 보는데 영수증 하나하나가 다시금 나에게 묻는다. 정말 필요해서 적절하게 지출되었던 것이 맞느냐고. 오펜하이머도 스스로에게 대답해야 했다. 영수증보다 훨씬 크고 중대한 문제들이라는 점이 좀 다를 뿐이었다. 원해서 앉은 자리는 아니었다. 굳이 되돌아보려 했었던 행동들도 아니었다. 감춰진 다른 이유가 청문회를 열게 만든 주된 이유였지만 통과해야 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옛 행위들이 증거사진처럼 눈앞에 들이닥치는 상황이었고 해명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해명은 나 자신에게도 향해 있었다. 결국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부끄럽지 않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졌고, 당당하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무안해졌다. 내 곁에 있는 이를 아프고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랑을 추구했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열정을 바쳐 기어이 폭탄을 만들어냈다. 몰라서 했던 행동들이 아니었다는 점이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 당시엔 그렇게 달려가야 할 마땅하고도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었다. 의문과 걱정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고, 양심에 어른거리는 불안감의 그림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앞에 내세울 이유가 분명했기에 일단 그 뒤에 자신을 숨겨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최소한 당시엔 그러했다.
내면을 비추기보다 외면을 이어붙이다.
우리도 안다. 모르진 않았으나 직면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르다는 것을. 가끔 솔루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들이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3인칭 시점의 화면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이 아마 그럴 것이다. 각각의 행위와 선택들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만 남아있으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그 장면을 같이 바라보는 순간 그 기대는 깨지고 만다. 청문회라는 거울 안에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실험을 이끌던 오피가 아니라 그 뒤에 조용히 숨어있던, 또는 거대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만능 슈트를 벗고 편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는 자신에게도 카메라가 향하고 있었다. 이번엔 역할 뒤에 숨을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판단을 보류할 수도 없었다. 아니 하자면 할 수도 있었겠으나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오펜하이머가 왜 그런 입장을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단순히 죄책감 때문이라고 정리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었다. 고민의 깊이는 무거운데 해석이 너무 가벼우면 무시한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대신 영화는 여기서 다른 방향을 찾았던 것 같다. 영화엔 또 하나의 청문회가 나온다. 청문회의 배후가 드러나는 청문회라고나 할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스트로스 제독에 대한 청문회였기에 본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는 연관성이 없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두 청문회 사이엔 밀접한 인과관계의 비밀통로가 이어져 있음이 드러나게 되며, 그것이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을 뒤짚는 결과로까지 이어진다.
어떤 면에선 영화적으로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도 보인다. 드라마틱한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여부가 가져다주는 스토리적 쾌감이 건축물의 웅장한 외관을 지탱하고 있다면 나비효과처럼 얽힌 작은 감정의 실타래가 어떻게 인물들의 생애 궤적을 저토록 복잡하게 틀어놓았는지를 바라보는 과정은 건축물 바깥이 아닌 안으로 걸어들어갔을 때 받게 되는 감상과 닮았으니까. 그렇게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으로 더 들어가기보다 서로 다른 두 청문회를 연결시킴으로써 투 톤 컬러의 스웨터처럼 스토리를 직조해냈고, 그래서 영화는 멋있어졌다.
다만 오펜하이머로부터는 조금 멀어졌다.
선택이란 선택할 수 없음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오펜하이머는 인류사의 변곡점에 자신의 인생이 겹쳐진 순간 그 거대한 파고에 올라타는 것을 선택했다. 운명의 이끌림이었는지 공명심의 유혹이 더 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선택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성공이라는 열매 뒤, 머리 위엔 화려한 면류관이 씌워졌지만 발목엔 돌이킬 수 없는 책임의 쇠사슬이 달렸다. 성공은 성공으로만 남지 않았다. 대통령실에 들어갔던 오펜하이머의 고백처럼 원폭을 탄생시킨 위인이라는 매력적인 칭호는 결국 바다 건너편 수많은 피흘림을 대가로 피어났던 결과였기도 했고, 스트로스처럼 누군가에게 그 성공은 우리집을 넓히기 위해 무너뜨려야 하는 옆집 담벼락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내면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그를 비난하고픈 마음은 1도 없다. 그렇다고 트루먼의 말처럼 원폭 투하의 책임으로부터 그를 지우고픈 마음도 없다. 원폭을 떨어뜨렸던 것이 정당한 것인지, 더 거슬러 원폭을 만들어냈던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답을 내기 어렵다. 오펜하이머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원폭은 개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원폭이 3차 세계대전을 저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결국 원폭이 터지기 전까지만 유효한 시한부 주장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지구상 위엔 이제 원폭의 도미노가 깔려 있다. 어디에선가 한 번이라도 터지면 연쇄반응처럼 이어진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지 않나. 이제 아차 하면 같이 떨어지는 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막다른 길목에서의 대치는 극적인 화해 아니면 공멸이다.
영화는 원폭을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동격으로 놓고 싶어했지만 애초 활용의 목적과 전달하는 이의 의도 자체가 아예 달랐던 둘을 그런 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조금 무리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히려 판도라의 상자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영화에서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바위를 들추지 말라는 얘기가 거듭 나오는데 이게 현실을 더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이게 선택인지 운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허나 분명해보이는 지점은 있다. 예언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무언가 있어보이는 바위가 있다면 항상 들추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언할 수 있다.
다만 오펜하이머에게서 프로메테우스가 겹쳐 보이는 지점은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과를 선택할 수는 없다. 문을 연 것은 나이니까 문 앞에 다가오는 상황은 내가 받아들인다. 그렇게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패배적이거나 수동적인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다만 그 결과가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영역까지 넓어졌다는 것이 문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그의 시선이 무척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맞다는 것은 맞았던 것일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영화가 먼저 떠오른다. 제목에서 풍기는 호소력이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던 영화였었다. 일단 지금은 영화는 놔두고 그저 제목만 가만히 들어올려서 옮겨보자. 우리네 삶 위에다 말이다. 그 문구가 내 인생의 여러 장면들을 그대로 읽어주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한때 정말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었지만 지금도 과연 그러한가 싶으면 아닌 것들이 꽤 된다. 한때 정말 사랑한다 여겼던 것들과 헤어질 수도 있었고, 한때 정말 목숨 바쳐 지키리라 했던 것들도 변할 수 있었다. 그럼 뭐지... 틀렸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간단해 보이는 상황조차 점점 더 맞고 틀리고를 판정하기 쉽지 않다고 느낄 뿐이다. 오펜하이머를 통해 잠자던 고민이 깨어났다.
처음엔 맞고 틀리고를 얘기하기가 왜 어려운지에 대해 하나씩 짚어보며 살펴보고 싶었다. 짜장면과 새옹지마 얘기부터 시작해서 신화와 성경 속 심판 이야기, 양자역학으로 대변되는 모순의 공존 등 온갖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그 와중에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까지 인류사에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얘기하고 있듯 피해자의 깃발은 어느 한 쪽의 땅에만 펄럭일 수 없었다. 나의 상황이 그와 비슷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지금의 난 정답을 잃어버렸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일반적인 가치관에서도, 종교적인 신념에서도... 그런데 그렇게 정답을 잃고 혼돈에 빠진 존재가 맞고 틀리고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했다니...
상황 자체는 아이러니하지만... 뭔가 내재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과정이 일종의 증명일 수도, 일종의 변명일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하나씩 그 과정을 정리하다보면 지금의 내가 디디고 있는 상황과 위치가 생각보다 그리 이상한 자리가 아니라는 근거 한 줌이라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랄까.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참가자가 언급한 뒤 가슴에 오래 남았던 말이 있었는데 '경계선에 있는 존재'라는 표현이었다. 그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진 않지만 지금의 내가 그렇다. 그래서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었다. 확신보다는 불안이었고 안정보다는 불편함이 따라오는 상황이었다. 다만 경계선 너머에 대한 기대를 아직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보다 확실하게 붙잡고 싶은 줄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것은 한편으론 본능적이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사람들은 생각보다 왜곡되고 편협해 보이는 신념에도 쉽게 자신을 내어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현상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상황이 더욱 공고하고 오래도록 지속된다. 또한 슬프게도 그것이 주는 편안함이 때론 마약과도 같아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사람들의 회심 고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듯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와도 쉽게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는 아니지만 우리 사회 안에도 편협하고 적대적인 기준으로 편가르기를 유도하고 증오와 비난의 시선을 가르치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은 출퇴근할 때 받는 전단지보다 훨씬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존재하던 확고해 보이던 가치들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데 자신만이 정답인 양 자신있게 소리치는 이들은 예전보다 더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제 함께 수호해야 할 공통의 가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옳음은 이제 조금만 자리를 옮겨도 다르게 해석되고 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빠르게 이기적인 욕망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과거 우리의 신념이 조금 허술하긴 했었지만 이토록 허무하고도 무기력하게 무너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가치'는 '이익'과 같은 길을 가기보다 다른 길을 걷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이제 '이익'이 판단과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하는 순간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젠 정의에 반해도 정당할 수 있게 된다.
이익을 따르기로 결정한 이들이 들어간 식당에 놓인 메뉴판이 눈에 들어온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선택해야 하는 것은 결과가 아닐 수도
안타깝지만 옮음을 외치는 것으로는 옮음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서로 옳음을 외치고 있으나 결국 손을 넣어 뒤적거리며 찾는 것은 이익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나. 물론 이건 사람들이 모두 겉으론 경찰복을 입고 뒤로는 나쁜짓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실제론 훨씬 복합적이다. 한 가지 사안은 결코 한 가지가 아니며 다층적인 상황의 종합이기에, 한 상황에 대한 평가는 시간에 의해서도, 그리고 시선과 시야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에. 여전히 판정은 쉽지 않다. 오펜하이머의 행동을 쉽게 비난하거나 칭송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정의를 위해 행동한다 말하지만 정의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저 우리는 순간 순간 정의를 추종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롭고 싶다고 정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정의로움에 나를 맡기는 것만이 열려 있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정의가 나를 소유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우린 늘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모든 상황과 조건들이 완벽하게 가늠이 되고, 지금의 선택이 일구어낼 결과가 분명하게 예상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반대에 더 가깝다. 게다가 어느새 달려온 욕망이 선택의 순간에 끼겠다고 조르면 상황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짜장면과 짬뽕 앞에서도 선택이 쉽지 않은데 중요한 순간의 올바른 선택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행동만이 선택은 아니다. 때론 평가도 선택이다.
다만 결과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가치'에 투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물론 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지만 늘 익숙한 자리로 회귀하는 내게는 아직 많이 버거운 '따름'이다.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생각을 출발시키기는 했다. 자주 걸어 길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