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은 멀고 해소는 가깝다

두 개의 이야기 하나의 비극 : 조커-폴리 아 되 / 이니셰린의 밴시

by ㄴㅏ름대로

한때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신제품의 차기작이 드디어 발표되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조커라는 오래된 이름에 새로운 옷을 입혀 무대 위에 올려놓자 관객들은 새롭고도 흡입력 있는 서사에 자석처럼 끌렸고 조커의 춤과 워킹에 환호를 보냈었다. 세상을 그 전과 후로 나눴다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바로 전인 2019년 말이었다. 그리고 5년이 흘러 후속작(조커-폴리 아 되)이 나왔다.


예고편을 통해 달궈진 기대감은 평소 쇼핑을 잘 하지 않는 이들마저 끌어낸다는 블랙 프라이데이의 마트 앞처럼 뜨거워 보였다. 나 역시 영화관 갈 날을 가늠하고 있었으나 생각만큼 시간이 잘 나지 않아 예매는 못하고 있던 중 (좋은 일은 아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로 기존 계획이 무산되면서 예정에 없던 시간이 주어졌다. 비극적인 날엔 비극적인 영화가 제격이지, 큭. 점심 영화를 오전에 예매하고 극장으로 향한다.



조커와 밴시15.jpg 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중(편집)


아마 개봉하고 채 2주가 되지 않은 시점이었을 것이다. 평일 낮이었지만 아이맥스 영화관에 나 포함 채 5명이 되지 않았다. 그토록 이목을 끌었던 개봉작이었는데 관객이 이렇게나 없다니... 최근 좋지 않은 평이 많았다지만 이 영화가 그 정도였나 싶은 생각이 드니 어느새 슬며시 옆자리에 앉은 우려가 광고시간 내내 불행을 속삭인다. 하지만 일단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 넓은 극장을 전세라도 낸 것마냥 관람하는 것은 호사라고 불러도 무방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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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우연, 운명의 향기인가...

며칠 전 봤던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영화의 복잡한 인상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남아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주연으로 나왔던 배우 브렌단 글리슨(이름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이 조커 영화에서 초반부터 화면에 얼굴을 채운다. 교도관 복장을 하고서. 조커이자 아서의 전담마크맨이었던 그는 첫 장면부터 포스를 폴폴 풍긴다.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교도관의 얼굴에 자꾸 아른거리는 콜름(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맡았던 역할)의 그림자를 떨쳐내려고 노력하는 와중 스쳐간 뜬금없는 생각 하나. '두 영화 사이에 어떤 특별한 연결점이라도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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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단 글리슨 : (좌)'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콜름 역 / (우)'조커-폴리 아 되'에서 교도관 역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간단했다. 아서를 조커로 풀어준 전편의 결론은 속편에선 감옥이라는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아캄 수용소엔 아서의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모두 수감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론 조커가 풀려나길 기대하는 세력과 조커의 소멸을 바라는 세력의 대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대립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가 영화의 줄기였고 두 세력을 매개해주는 물리적 무대는 재판장이었다. 재판장에 양립한 두 주장과 근거는 우리의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소 진부할 수 있었던 재판과정이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주된 원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법률적 다툼 형식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지 않고 재판장 안에서의 헤게모니를 누가 쥐게 되느냐로 살짝 비틀고선 수동적 판결의 대상자인 피의자 조커를 재판과정의 주체로 변모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피의자 조커를 향한 양측의 주장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은 조커이자 아서의 심리적 줄다리기 결과이다. 이 과정을 위해 등장한 새로운 인물이 바로 (나중에 할리퀸으로도 불리는) 리 퀸젤이었다.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갇힌 아서의 육체가 풀려날 수 있느냐의 판결 과정은 과연 아서의 내면에서 조커가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느냐와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키를 쥔 이가 바로 리 퀸젤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각자 다른 목적지를 향하는 아서와 조커임에도 둘 모두 같은 내비게이션을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기본적으로 전편과 다른 구도임이 명확했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밑으로 끝으로 끌어당기는 추락의 과정을 보여주다 눌린 압력에 오히려 튕겨오르듯 떠오른 조커를 보여줬던 전편과 달리 이번 속편에선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아서의 내면이 주된 배경이자 흐름이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그러할진대 양쪽의 인력(引力)에 의해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이 조금 더 현실적으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싶다. 어느쪽으로 기울게 될지 예상하지 못해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조마조마함을 선사하는 대신 영화는 계속 그자리에 있으려 하는 아서를 끊임없이 조커로 이끌어내려는 리 퀸젤이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변호사 등 반대쪽의 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변호사의 아서는 피의자 아서일 뿐, 아서 자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서 또한 피의자 아서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일단 영화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내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편에서 보았던 호아킨 피닉스의 놀라운 연기는 속편에서도 인물에 깊이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확실히 훌륭한 배우들은 화가처럼 상상속 인물의 눈짓과 표정과 행동을 눈앞에 턱 그려내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 현실화시킨 상상력에 기쁜 마음으로 빚을 지고서 빠져든다. 레이디 가가의 리 퀸젤도 대단했다. 솔직히 말해 손가락 총을 머리에 대는 모습으로 아서와 마주하는 첫 등장신부터 그녀의 존재감에 매료되었다. 미술적이고 디자인적인 화면에 대한 감흥도 빼놓을 수 없다. 감옥이라는 공간을 십분 활용한 다양한 사각의 프레임이 인물을 조이기도 했다가 풀어주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공간에 찾아온 작은 불빛들은 어느새 심리적 초점으로 빛나고 있었다.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마저 연기지도를 받고 있었으니 배우들의 호흡과 표정, 심리적 변화와 분절, 섬세한 동작이나 인물의 상징들이 마치 근접해 찍은 꽃처럼 보이고 화면 하나하나에 빨려들어가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이맥스 화면은 큰 역할을 했다.) 다만... 노래들은...



조커와 밴시16.jpg 조커-폴리 아 되 스틸컷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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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의 등장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뮤지컬로 표현된 부분은 뭐랄까... 과속방지턱 같다고나 할까... 존재의 의미는 이해하겠으나 진행하던 흐름에 더해지는 덜컹거림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도로상의 방지턱은 존재의 의미가 더 중요하기에 필요한 자리에 있어야겠지만 영화적으론... 답이 쉽진 않다. 오케이, 존재의 근거는 인정! 하지만 주행속도(스토리적 흐름이자 배우들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고 설득시키는 속도)의 자연스러움은 어쩌려고? 아서에서 조커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전편과는 달리 속편에선 빨간불(뮤지컬)이 켜지면 그때 조커가 지나가고, 다시 파란불이 켜지면 그제서야 아서가 운행을 이어간다. 우린 조커를 따라갔는데 갑자기 다시 신호등이 바뀌었던 사거리로 되돌아와 아서의 진행방향을 좇아가야 되는 상황이다.


뮤지컬이 아니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정당하긴 하나 충실하진 않다.

영화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 아서에서 조커로의 일방통행 하나를 설득시켜야 했던 전편과 달리 속편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조커와 아서를 보여줘야 했기에 필름이 돌아가는 시간을 분할해 각각의 존재를 비춰주는 것 이상의 방법을 찾긴 매우 어려웠으리라 가늠이 된다. 영화 전체를 거시적이라 보고, 장면 장면들을 미시적이라고 가정한다면 미시적인 측면에서의 어색함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으나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뮤지컬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아서와 조커의 분열, 현실의 아서와 망상의 조커, 그 안에서 누가 주인공이 될 것이냐를 놓고 대립하는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주된 포인트이기에 그 갈등과 분열이 펼쳐지는 한가운데에선(어차피 주인공의 심리적이고 존재적인 갈등이기에) 우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뮤지컬이 아니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정당하긴 하나 충실하다 보긴 어렵다. 지금의 뮤지컬 방식 이상으로 조커를 잘 보여줄 다른 방식을, 최소한 고민의 흔적이라도 제시해야 완성되는 의문이다. 그리고 조커 자체를 기대했던 이에게 비춰지는 뮤지컬은 본질적 실망 뒷편에 자리한 부가적인 요소일 뿐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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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중


아쉽게도 정해진 분량의 필름이 거의 풀려갈 무렵에 펼쳐진 사건들에선 충분한 개연성을 찾진 못했다. 하지만 더 큰 아쉬움은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감상적 쾌감에서 이제 일어나야 했다. 몇 명 되지 않는 관객들 중에서 괜히 제일 늦게 나가본다. 마치 영화관에 혼자 있었던 것처럼...


다만 다른 의미도 있었다. 개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맛은 있는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는 경우처럼. 전편의 스토리적 결론(조커의 탄생)은 결코 유쾌하다 볼 수 없지만 결국 설득되었음을 인정하게 만들었었다. 꾹꾹 눌러담은 서사와 배우의 연기력에 설득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속편은 무언가 잘 잡히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전시된 화려한 행사장을 둘러봤는데 돌아가는 순간엔 빈손인 느낌이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추리소설에서 살인사건의 현장부터 되짚어 사건을 역추적하듯 우리에게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던 과정들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가 단순히 조커와 아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은 아니라고 느꼈지만 그럼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라는 물음엔 정확하게 답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 영화도 쉬운 영화가 아니었구나...


자연스럽게(?) 영화관을 나오는 시점부턴 이니셰린의 밴시로 인해 생긴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복잡한 문제가 두 배로 늘어났다. 물론 두 영화는 전혀 겹치지 않는다. 장르도 완전 다르고 아주 다른 표현방식을 지녔다. 단지 출연하는 배우 한 명이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배우야 어떤 영화에든 출연할 수 있으며 그건 매우 평범한 일이 아닌가. 그저 내가 두 영화를 비슷한 시기에 보았던 사실에 매길 수 있는 추가적인 의미가 있나? 우연성에 근거한 이미지임은 분명했다. 배우로 인해 촉발된 연결성은 허상이겠지만 무언가 그 이상으로 이어진 이 느낌은... 당시로선 이유가 있었으리라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토드 필립스 감독과 마틴 맥도나 감독 모두 내가 그리 잘 아는 감독이 아니다.(하긴 다른 감독이라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단지 우연히 관람시점이 겹친 영화 두 편을 가지고 감독의 비슷한 시선과 철학적 배경을 찾아내려는 이 과정이 좀 억지스럽지 않느냐고 지적한다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 다만 우연에서 촉발된 질문의 발자국을 좇아가다 보니 각 영화의 창문에서 같은 곳을 바라본 흔적들이 나타나곤 했었던 것 같다. 대단할 것은 없겠으나 이번엔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좌)'이니셰린의 밴시' 포스터 중 / (우)'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중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이 펼쳐진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향하게 되고 해당 사건의 전개와 결말에 주목하게 된다. 사건의 중심에 놓인 주인공도 고통이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건 바라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속 결론이 아니더라도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을 종결시킬 것이고 우린 그걸 기대하며 영화를 관람할 것이다.


다만 포인트는 고통의 크기나 처절함이 아니다. 이번엔 시선을 조금 안쪽으로 던져보자. 고통을 생산해내는 배경이자 토대를 바라보기 위해서이며 그 배경과 토대가 건재한 이상 고통은 다음에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적 통찰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불편한 현실이자 한계점들이 거기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은 끔찍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두 번째 세계대전을 겪어야만 했다. 파괴적이고 파멸적인 전쟁을 겪었음에도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와 뒤틀린 욕망과 어긋난 진심은 그대로 놔뒀기 때문이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각자의 신념에 기반한 행동이, 설사 그것이 어떤 대단한 이념이나 거대한 욕망과는 거리가 먼 아주 사소하고 소소한 기대로부터 출발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의도치 않게 폭력성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한 번 시작된 폭력이 애초의 소소한 기대와는 다르게 손댈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자라날 수도 있음을, 그런데 그 상황이 폭력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피어나고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잔잔한 일상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출발점에서 보았을 땐) 한 사소한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와 아서라는 두 존재를 안고 있는 한 인물과 그를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어떻게 서로를 삼키며, 때때로 어긋나기도 하다가 때로는 거래로 이어지기도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급하게 숨겨진 교훈을 발견하거나 해답을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 일단 판단과 해결 이전에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감독의 그런 관점이 겉면에 바로 드러나진 않는다. 등장인물들 앞에는 가히 '절망적'인 상황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고 각각의 인물들은 치열한 몸부림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오고자 노력하는데 그 처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들 속에서 감독의 담담한 시선을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담함이 여기선 핵심이다. 고통에 대한 직면은 용기나 연민을 통해서가 아니다. 고통을 직면하기 위해선 담담함이 먼저 필요하다. 담담함이란 무미건조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섣부른 가치판단과 고통을 줄이겠다는 본능적 욕망을 자제하고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천천히 바라보는 것, 그게 여기서 말하는 담담함이다. 거기서 나오는 진실이 무엇일지라도 그대로 받아내겠다는, 잔잔하지만 진중한 자세로 바라보는 '직시'이기도 하다.


이 두 영화를 보고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난해한 영화라서라기보다는 결국 이 영화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불편한 부분을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설사 '비극적'일지라도 말이다.





비극 하나
진심을 원하지만 진실은 외면한다. 어긋나는 순간부터 고통은 깊어진다.


당연하겠지만 누구에게나 고통은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물론 운동처럼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는 전제 아래 한정된 범위 내에서 수행되는 고통도 있긴 하지만 쓴 약을 먹기 싫어하는 이유는 몸에 좋은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다는 것, 힘들다는 것, 당장 내 몸에 일차원적으로 가해지는 그 고통스러움을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고통이란 감각은 신체적 감각의 전유물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종종 마주하는 통증이기도 하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고, 그건 심리적 고통을 덜 겪기 위해서라도 삶의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우린 관계의 진실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린 끊임없이 상대방의 '진심'을 가늠하고 측정하며, 그 수치에 적합한 행동유형을 학습한다. 그리고 우리의 습득 과정엔 나의 진심 표현 정도도 포함되어 있다. 섣불리 아무에게나 내 진심을 다 드러내진 않으니까. 그렇게 우린 서로의 진심을 복잡한 계산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다 두게 된다. 소수이지만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더더욱 소중하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채워주는 것은 다름아닌 그 작은 몸에 담긴 충만한 진심일 것이고, 연인들이 끊임없이 확인하고 갈구하는 것도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임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와의 우정에서 나타나는 놀라운 기대치는 꼼꼼하게 작성된 계약서란 존재의 유용성을 훨씬 상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꼭 커야만 할 필요도 없다. 작은 진심에도 우린 얼마든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니까. 다만 문제는 진심이 어긋나는 순간이다. 진심이 늘 마주보기만 하고, 늘 같은 곳을 바라보기만 하면 좋겠으나 빗나간 사랑의 시어가 그토록 많은 것처럼 진심도 그렇다. 진심이 어긋났음이 진실일 때, 그때 진실은 고통을 업고 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의 무게는 진심의 깊이에 달렸다.



조커와 밴시21.jpg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중


#. 이니셰린의 밴시 : 때론 진실이 더 아프다. 진심이 오히려 고통을 더한다.


니셰린의 밴시는 갑자기 하늘에서 쿵 떨어진 조명기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영화 트루먼 쇼처럼 매우 독특한 출발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호수처럼 잔잔한 아일랜드의 작은 섬마을 이니셰린.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두 친구 중 한 명(콜름)이 갑작스럽게 이제 너(파우릭)와는 말을 섞지 않겠다고 절교를 선언하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이 단절에 파우릭은 너무 충격적이고 당황스럽다. 게다가 콜름은 자신의 이 선언이 진짜 중대한 결심이자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는 증표로 무시무시한 맹세를 할 정도다. 자신의 남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과 음악, 그런데 그 바이올린을 켜기 위해 필수적인 자신의 왼손가락을 걸어버렸다.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친구의 절교 선언에 고뇌에 빠진 파우릭. 섬만큼이나 평온했던 그의 삶까지 끝모를 진창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다. 그에겐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과의 소소한 수다가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살아가는 의미였으니까. 그런데 고민과 방황 속에서 회복을 꿈꾸며 어렵사리 찾아낸 방편들은 오히려 상황을 끔찍할 정도로 악화시킬 뿐이다. 돌이킬 지점도 희망도 점점 짙은 어둠 속에 갇혀버리고 있었다. 막상 영화를 볼 땐 일이 이렇게까지 갈 일이었나 싶을 정도까지...


하지만 그렇게 펼쳐지는 충격적인 결과들이 과연 과장이었나 되물으면 쉽사리 아니라 대답하기 어렵다. 분명 흔한 상황은 아니지만 둘 모두 진심이다. 아니 어떤 면에선 정말 진심이었기에 저런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제는 좀 시간이 지난 일이긴 한데 부모님과 화기애애하게 같이 식사하던 날이었다. 이후 과일을 밥만큼이나 많이 내오시는 어머니의 변함없는 스타일에 약간의 농담을 곁들인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뉴스에 나오는 어떤 사안을 놓고 아버지와 정치적인 견해가 갈리며 논쟁이 이어지고 집안 공기는 갑자기 무거워졌다. 주장하는 바가 전혀 다르지만 묘하게 하는 말은 비슷하다.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라는 입장이기에. 다만 그 입장이 서로 너무 달라 문제일 뿐이다. 각자의 입장에 뿌리박은 서로의 진심이 너무 깊기에 소통의 숨통은 점점 좁아졌고 결국 우린 중간에 의도적으로 대화를 끊어야만 했다.


이 영화가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아일랜드 내전은 예전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영화에서도 나왔듯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도록 만든 전쟁이기도 했다. 실제로 어디에서 일어나든 내전이란 결국 내가 알던 사람, 내 주변에 살던 사람, 심지어 내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누가 먼저 죽음을 배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발사된 총알은 누군가의 피를 마셔야만 멈추고 옳음의 대변인은 결국 마지막 남은 총구가 대신한다. 흩어진 숨결은 무엇으로도 되담지 못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진심이 비극의 깊이를 더한다는 사실이다. 서로 정말 가슴속 깊은 진심을 꺼내놓고 있고, 서로 아끼는 마음도 여전하나 결과적으론 그 진심에 기반한 행동이 서로를 가장 깊이 찌르고 가장 아프게 베어내고 있으니까.


콜름과 파우릭처럼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는 관계에서도 서로의 진심이 어긋나면 이렇게나 서로를 파괴할 수도 있구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였는데 그런 관계성마저 없는 이들 사이에선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생각해보면 16세기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처럼 역사엔 이런 결과가 생각보다 꽤 많이 등장한다.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여기고 싶은 기대마저 결국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조커와 밴시22.jpg 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중


#. 조커-폴리 아 되 : 진실이라는 검색대 앞에 놓인 사랑. 사랑이라 꾸며도 진심은 욕망에 있기 마련이다.


조커 속편에선 감옥이 주 배경이다. 우리에겐 갑작스럽지만(?) 조커는 다시 아서로 되돌려져 있었다. 감옥에서의 첫 장면에 나타난 그의 뒤틀린 듯한 깡마른 뒷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감독은 우리와 함께 새롭게 주어진 출발선에서 다시 묻는다. 아서는 조커인가 아니, 아서는 조커가 되어야 하는가? 전편의 조커가 우연적 사건의 겹침과 외부적 환경에 기인한 바가 큰, 작은 확률을 뚫고 나타난 희귀한 조커라면 이번엔 천천히 내면에서부터 그 필연성을 되물어보자는 얘기인 듯싶다. 동네 아이들의 묻지마 폭행도, 지하철에서의 총격사건을 유발했던 가진 자들의 업신여김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없을 수는 있겠으나 없앨 수는 없다고 본다. 이 두 사건은 아서가 겪은 우연적 사건이었고 세부적인 조건까지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살던 곳이 고담시라는 것을 잊지 말자. 언제라도 다시 만날 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보다 본질적인 부분은 아서 자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편에서 보았듯 그토록 인정을 꿈꿨던 자신의 희망 머레이에게, 그리고 하나뿐인 감정적 기대자 어머니에게 느낀 배신감이 아서를 조커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였다. 아예 희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한 줌 희망에 배신을 당했기에 추락의 폭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전편에서 상실한 그 희망과 사랑이 회복된다면? 인간에 대한 희망과 진실한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면 조커가 되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 그 말인즉 리와의 사랑이 진심일수록 아서는 조커가 되어야 할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말이다.(극에선 아서의 친구였던 ‘개리’도 그 한 축을 담당하긴 했으나 개연성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조커도 리를 사랑하고, 아서도 리를 사랑했다. 조커는 자신이 조커라는 당위성을 확증하기 위해 리의 사랑이 필요했고, 아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 리의 사랑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리는? 끊임없이 아서에게 당신 자신이 조커라고 일깨워주듯 말하는 리였다. 사랑은 달콤한 유인책이자 촉매제였다. 비극의 씨앗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조커를 만들 수 있는 이도 리였고, 아서를 지켜줄 수 있는 이도 리였기 때문이다.


이 비극의 삼각형에서 조커는 리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아서는 (자신도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등) 리의 말이 거짓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사랑을 의심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삼각관계에서의 비극은 주로 어긋남 때문이다. 만나야 할 꼭지점은 세 개인데 이을 수 있는 선은 하나뿐이기에. 하지만 더 비극적인 경우는 선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사랑이란 이름이 내용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포장지로 쓰일 때가 더 많다는 현실은 많은 이들이 겪는 비극이다.


리의 사랑은 외형적으론 조커에게만 향했다. 하지만 그 사랑의 본질은 자신의 극중 대사처럼 ‘환상’에 가까웠다. 자신의 환상과 망상이 투여되고 완성되는 대상이 조커였을 뿐이다. 아서의 사랑이란 감정의 진심은 결핍에 대한 채워짐의 욕구에 가까웠고, 리의 사랑이란 이름의 진심은 자신의 충동적 자아를 개방시키고 빛나게 해줄 존재에 대한 갈구였을 것이다. 조커 입장에선 엄밀하게 말해 꼭 리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오히려 없는 것이 더 조커답기도 하다.) 사랑이란 포장지로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진심은 이미 애초부터 어긋나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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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각관계의 끝을 예견한 장면은 리가 감옥을 나가기 전 두 사람이 나눈 정사신이 아닌가 싶다. 리는 계속해서 조커를 그려내고 있지만 리와 결합하려고 애쓰는 이는 결국 아서였다. 아서는 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해와 사랑이 조커를 아서로 되돌리는 키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키를 쥔 대상은 아서를 조커로 만들어야만 하는 할리퀸(리 퀸젤)이었다. 아마 이것은 감독이 원했던 비극적 구도이기도 했을 것이다. 갈구했던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만큼 잔인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은데 심지어 아서는 그 잔인함을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한 번, 감옥에 들어와서도 한 번 더 겪어야만 했다. 전기의자는 호흡을 가져갈 수 있다지만 감독은 잔인하게도 아서를 진실의 의자에 두 번이나 앉혔다. 어떤 면에서 그저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자 했던 아서의 진심이 더 처절하게 꺾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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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둘
진실엔 손잡이가 없다. 진실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예전엔 하나의 사건에 대한 가장 적합한 해석은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지금도 입장이 아예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으론 추리소설 형사의 입장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과 믿기 어렵지 않은 사실로 나뉠 순 있어도 사실 자체는 하나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이기도 했고, 해석이 갈리는 양측에 대해 그럴듯한 비판 몇 마디를 던지며 결국 이도저도 아닌 입장을 취하면서, 결과적으로 해석의 복잡성에 대한 책임을 쉽게 무마해 버린 채 그것이 마치 잘된 해석인양 내세우는 행태를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수록 하나의 사건이 가지는 다층적 실체를 조금씩 느끼게 된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때에 따라 정말 모순적 결론을 동시에 인정해야 하는 괴로움도 종종 느낀다. 하지만 해석이 점점 어렵고 복잡해지더라도 피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답이 될 순 없다. 일단 최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은 편애가 없다. 손잡이도 없다. 그 날카로움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두 영화의 감독 모두 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조커와 밴시23.jpg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중


#. 이니셰린의 밴시 :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는 법이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파우릭은 '다정함' 그 자체다. 그는 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했고, 심지어 그의 다정함은 제니(파우릭이 키우는 당나귀)를 비롯해 동물들에게도 동일하게 미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 '다정함'은 때로 지루함도 되고, 멍청함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붙여주는 말이 주로 다정함이라는 표현일 뿐 실제 사람들의 속시선은 다양했던 거였다. 왜였을까? 사실 단순하다. 굳이 관계성에 상처를 내고 평화를 깨트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까지는 아니지만 감추고 싶은 부분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대표적인 방안이다. 회사처럼 공적인 자리에서도, 연인과 부부처럼 사적인 사이에서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그럼으로 인해 평온해 보이는 일상은 유지되지만 진실이 호도되거나 속으로 썩어들어가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콜름은 파우릭의 절친처럼 등장했지만 실제로 파우릭의 지루함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자 절교를 선언한 것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파우릭을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콜름과 파우릭의 관계에 대해서도 막상 둘 사이가 벌어지고 나자 사람들은 전부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다는 속마음을 꺼내놓는다.)


더 비극적인 점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매달린 가식만 탓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정함을 삶의 신념처럼 여겼던 파우릭 자신이지만 정작 평생 같이 살아온 여동생이 오래도록 고민해온 지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외로움에 대한 그녀의 고민을 단 1도 마음에 담아내지 못한 채 그저 바보같은 소리라는 딱지를 붙여 쏟아버릴 뿐이었다. 콜름을 절친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파우릭이었다. 드러내지 않아서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쳐다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또는 '내게 필요한'이란 창은 내가 그 사람을 바라볼 때만 사용 가능하지 그 사람의 원래 모습을 규정하거나 현재 그 사람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창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하는 쳐다본다는 행위는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하는 의지가 담긴 노력이자 이해를 중심에 둔 태도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조금만 관심을 두고 쳐다만 봤었어도 사태의 심각성은 훨씬 줄어들 수 있었다. 아니 아예 다른 결말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파우릭은 분명 다정하다. 가식적인 사람들의 평가를 덜어내더라도 그를 다정한 사람이라 부르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되진 못한다. 시와 음악만이 결국 남을 뿐 다정함 따위는 모두 잊혀지고 만다는 콜름 앞에서 술에 취했음에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의 다정함이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자신의 신념을 토해내는 그의 진심은 뒤에서 듣고 있던 동생도 감동시켰고, 반박하던 콜름도 침묵시켰으며, 시청하던 나 역시도 공감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 함정이다. 그건 앞면일 뿐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의 소중한 것을 모르고,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두지 않는 태도를 과연 다정하다고 볼 수 있을까. 뒷면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조커와 밴시24.jpg 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중


#. 조커-폴리 아 되 : 환호의 울타리 안쪽과 확신의 기둥 밑바닥은 늘 확인해야 한다.


조커 전편에서 많은 이들이 아서가 결국 조커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결론을 수용했다. 게다가 조커는 그저 비극적인 한 개인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심볼이 되어버렸다. 좋든 싫든 그는 이제 고담시청 표출창구 최전방에서 수많은 민원인들의 분노를 모아 들고 있는 존재였다. 필연적으로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며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의 욕망을 받아 안아야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얼핏 조커를 필두로 하여 나머지 사람들이 뒤따르는 형국처럼 보이겠으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뒤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새롭게 등장한 조커를 (필요에 의해) 붙잡았다고 보는 것이 더 실재에 가깝다. 그러했기에 이는 속편에서도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감독은 이 관점을 스크린 밖에서 이 영화를 기다리던(자신이 기대하던 조커를 고대하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치를 받아 안아줄 누군가가 필요한 존재일 뿐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라는 특정 인물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극 안에서 할리퀸을 꿈꾸는 리 퀸젤도 마찬가지다.


조커 속편에서 많은 이들이 실망한 지점은 결국 조커는 없고 아서만 남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편에서 조커라는 희대의 빌런이 고담시의 한 평범한 시민 아서로부터 유래될 수도 있었다는 서사의 스토리를 수용했음을 기억해보자. 그런데 속편에 와선 우리가 따라갔던 그 서사의 주인공도 그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었다는 애초의 출발지점은 이제 감춰져야만 하는 비밀스런 과거로 묻어버리는 것일까. 방사능 오염으로 만들어진 돌이킬 수 없는 돌연변이 악당으로 여기기 전에 ‘내 생애 처음으로 날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네’라는 극에서의 대사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든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대상을 바라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존재를 구하고자 하듯,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 아서가 있었고 그 역시 살아서 존재하고픈 욕망을 가진 이였을 것이다. 어쩌면 감독의 관점은 애초부터 조커라는 빌런의 창조에 있지 않고 '조커-아서'를 통해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 우리 자신의 모습에다 조명을 비추려고 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권력과 힘이 있음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감추진 못한다. 아서를 훈육시키겠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교도관, 사형을 당하길 기대하면서도 책에다 조커의 사인을 받고자 하는 교도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장면이자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이중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아서 역시 마찬가지다. 조커가 된다면 강력해질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위태롭고 불완전하며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구멍은 더 깊어질 것이다. 자신에게 환호해주는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는 조커가 되어서도 정작 진정으로 필요했던 소소한 기대 하나를 성취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아서의 비극일 수도 있겠다.


더 슬프게도 아서 자신도 책임의 소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고 나타난 이가 평범한 아서를 원했던 것이 아닌 혼란의 중심 조커를 기대하는 이였다는 것을 결국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신의 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서를 비난하기엔 솔직히 우리도 나을 것이 별로 없긴 하다. 우리 역시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단 거기서 비틀어진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욕망하니까. 내 몸을 해하는 음식들을 탐하고 내 잠자는 시간을 깎아 먹는 핸드폰 화면을 놓지 못함은 그게 내게 필요해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나마 이정도면 양호하다. 내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선택 앞에서도, 내 정신을 갉아 먹는 이야기들 앞에서도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비극 셋
진실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 없인 해답도 없다.


차갑다는 것 말고는 무게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눈송이지만 밤새 내린 눈이 쌓이면 지붕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눈은 눈에 보이기라도 한다지만 서서히 쌓이는 것들은 종종 우리의 경계심을 허물고 마치 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신을 위장한다. 결국 위태로움의 경고등은 작동해야 할 시간을 놓쳐버린다.(안타깝지만 질병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생각보다 꽤 늦게 알아차리고 만다.)


반면 우리가 서둘러 풀어놓는 경우가 있다. 주로 분노의 감정이다. 가지고 있기에 힘들기 때문이다. 풀어놨기에 그 시간만큼은 해소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풀어놓은 것은 그저 나에게 쌓인 감정일뿐 나를 둘러싼 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구조 자체는 그런 나를 비웃듯 미동조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작 내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나를 둘러싼 상황과 구조인데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분노의 감정이다. 그게 더 즉각적이고 그게 더 진실인양 느껴지곤 한다. 설사 내가 보다 본질적인 상황과 구조를 바라보더라도 거기서 당장 해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렵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에 주목하지 않았을 때 종종 큰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문제는 진실만으론 해결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거기가 출발점인 것은 분명하다. 아마 두 감독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조커와 밴시25.jpg 이니셰린의 밴시 포스터 중


#. 이니셰린의 밴시 : 썩은 물도 잔잔할 수 있다.


이니셰린은 평화로운 섬의 상징과도 같다. 본토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총소리가 직접 들려올 정도로 가깝지만 본토의 참혹함과 달리 이곳은 어제나 오늘이나 늘 평화롭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평화는 평화롭다는 이미지 이상의 의미를 보장하진 않는다. 상처를 입어 피가 몸 밖으로 흘러나오면 그 상황을 우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알다시피 출혈은 몸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겉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겠으나 뇌출혈처럼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평화는 안과 밖,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섬 사람들의 종교적 기원이 모두 모이는 성당의 신부님에겐 조용한 섬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 소식들까지 모두 모이지만 막상 그 구심점이 되는 종교 지도자의 인식 수준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종교적 가치의 핵심 수행자를 신뢰할 수 없게 될 때 종교가 얼마나 무의미해지는지, 불안정한 사회에서 종교가 얼마나 무익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던 이니셰린이었다. 사회적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아무렇지 않게 밀주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하나뿐인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법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딱 그정도다. 경찰의 하나뿐인 아들 도미닉은 폭력에도 무방비지만 섬사람 모두에게 멍청이로 대접받는 외톨이 같은 존재다. 이렇게 마을 전체가 가담하고 있는 차별의 현실은 평화롭다는 이미지 아래에서 더욱 공고해지고, 섬사람들의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의지가 없는 섬이었다. 그럼에도 이니셰린은 어제처럼 그저 평온해 보일 뿐이고 한 잔의 맥주는 평범했던 오늘을 석양과 함께 넘길 것이고 내일은 벗어놓았던 어제를 다시 입을 것이다.


잔잔함을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잔잔함만 추구한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른스럽다는 칭찬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충실히 수행한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컸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억압되었던 것들이 새어나오고 터져나나오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지 않나.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이다. 이건 단순히 더러워진 곳을 치우고 오류를 고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직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우선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어떤 이미지가 필터처럼 들어오면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주 놓치는 지점은(때에 따라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기는 지점은) 그 필터 이미지이다. 평화로움도, 어른스러움도, 다정함도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안쪽의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순간부터 그 안의 더 많은 다른 것들은 그만큼 숨을 쉬기 어려워진다. 콜름은 결국 그걸 절교라는 형태로 찢고 나왔고, 동생 시오반은 오빠를 놔두고 섬을 떠남으로 인해 숨을 쉴 곳을 찾았다. 일단 편견 없이 안을 들여다보자. 거기가 시작점이다.



조커와 밴시26.jpg 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중


#. 조커-폴리 아 되 : 해결은 멀고 해소는 가깝다.


전편에서 보인 조커의 충격적인 행위와 더 나아가 조커라는 존재를 우리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게 된(최소한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주요 메커니즘은 조커를 단순히 개인적 존재로만 보지 않고 사회적 일원으로서, 즉 사회적 부조리를 짊어진 일종의 대표단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은 지독한 개인사적 불행까지 얹혀지자 구렁텅이 저 깊은 곳 한 나약한 존재 아서라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자,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짊어진 엿같은 운명을 향해 거친 욕설을 뿜어내는 모습처럼 읽히기도 했음이 사실이다. 설사 나 자신을 거기에 대입해봐도 그런 상황에선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겠다는 공감대도 피어났다.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빌런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우리와 같은 시민1에서 출발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비틀어지고 고약해진 이 사회가 품고 있던 악취를 조커를 통해 터트린 것이라 볼 수도 있기에 우리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선사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많은 이들이 속편에선 그 카타르시스가 더 확장되길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을 통해 그런 전개를 예상했던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가 있다면 카타르시스가 되었든, 아님 그와 유사한 다른 무엇이든 그것 자체가 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퇴근후 들이키는 알코올처럼 그 순간 우리의 괴로움을 달래줄 수는 있겠으나 바로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면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비상식적인 상사도 여전하고, 몰지각한 후배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문제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그렇기에 우린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물어볼 수 있다. 과연 아서가 조커가 되어야만 아서도 살리고, 이 사회도 살릴 수 있는 것이냐고. 조커는 해결사이기보다는 분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사실은 이상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이니까. 어쩌면 우린 해결이 아닌 해소로 버티는 삶을 매일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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