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미키&미키인가, 미키vs미키인가_봉준호식 SF 코디 패션

by ㄴㅏ름대로

미키&미키인가, 미키vs미키인가

3월이다. 사계절 중 봄에 속한다고 구분이 되지만 막상 3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경험으로도, 그리고 더듬어 떠올려보는 옛 기억으로도 우리가 흔히 봄 하면 떠올릴만한 봄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하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진 않은 시기, 봄 하면 떠오르는 초록의 잎들은 어디에 꼭꼭 숨어있는지 생각보다 눈에 잘 띄지 않고 떠난 줄 알았던 하얀 눈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날이 달 어딘가 살포시 끼워져 있는 시기, 그러다 마지막쯤에 나 보고 싶었어 하며 몇몇 꽃망울이 눈을 뜨는 시기. 액체와 고체의 그 어디쯤 있는 슬러시처럼 3월도 그런 달이 아닐까 싶다.


기다리던 영화 하나가 올 3월에 개봉을 했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이다. 재미있게 보긴 했는데 내용물에 대해선 갸웃거림이 남았나보다. 슬러시의 시원함을 즐기긴 했으나 시원함만 기억되고 정작 맛은 잘 떠오르지 않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이 맛은 무엇이지... 왜 굳이 이런 방식으로...'라는 생각이 계속 따라온다. 결국 또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영화를 만난 모양이다... ^^a


미키17 01.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봉준호라는 사람에게 SF 수트로 코디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 늘 그렇듯 장르적 특성은 전경으로써 기능하지 않는다. 대신 전경의 메시지를 증폭시킬 수 있는 배경이자 주요 소재를 잉태하고 있는 둥지 역할을 해줄 때가 더 많다. 이번 영화가 감독의 이력에서 최대의 제작비가 사용되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떠돌지만 설국열차, 옥자, 괴물 등 잘 알려진 감독의 작품들로 유추하더라도 SF라는 장르는 미키17이라는 상차림의 멋진 식탁보 이상의 의미를 가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복제인간이라는 소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기에 필수불가결했던 SF적 요소의 도입이었겠으나 소재가 아닌 내용만 본다면 우주선과 니플하임이라는 배경은 그대로 지구로 옮겨 어떤 폐쇄형 가상국가로, 또는 신대륙 발견과 같은 무대로 치환해도 같은 사이즈의 옷처럼 그대로 입힐 수 있었으리라. 물론 누군가는 보다 큰 장르적 만족감을 기대했을 수 있겠고 기대 자체야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개인적으론 장르적 쾌감까지는 아니겠지만 곳곳에 배치된 장르적 특성들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느꼈던 것 같다.


SF 영화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또다른 측면은 영화에서 구현된 가상세계를 통해 평소라면 쉽게 열어보지 않았을 법한 철학적 질문의 방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메시지가 중심이 되는 SF 영화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제는 꽤 오래된 영화이지만 (OST의 감동은 여전하지만) 철학적 SF 영화사의 한 자리를 굳건하게 차지하고 있는 블레이드 러너처럼 그런 유형의 영화를 찾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이 가본 길이다. 다만 이런 경우 영화가 무거워지는 결과를 일정 부분 감내해야 하는 숙제가 남는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지만 대중이 선호하는 질감은 아니라 해당 방식의 선택과 적용방식에 대해 감독도 고심했을 것이다.(물론 매트릭스처럼 매우 대중적이면서도 동시에 또 매우 철학적이기도 했던 독특한 케이스가 있기도 하다.)


미키17 (01).jpg 미키 17 스틸컷 중



이 영화도 소재상 분명 피해갈 수 없는 주제가 있기는 했다. '복제된 인간을 과연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막상 파고들자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꽤 많았으리라 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해당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단 살짝 옆자리로 안내한다. (영화 중간 멀티플에 대한 배경설명을 하는 과정에서도 나오듯) 질문 자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철학적인 답변을 찾는 대신 사회학적인 질문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듯싶다. 그래서 영화는 복제된 인간의 인간성을 논하기보다 복제된 인간을 '다루고 대하는' 존재, 즉 이미 인간임을 의심하지 않는 인간들의 인간성을 역으로 의심해본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가상화폐의 '화폐성'을 인정하는 것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대해 경제적인 차원이든 정치적인 차원이든 아니면 학술적으로든 논의해 답을 찾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화폐성에 대한 답변은 현실적으로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상화폐가 이미 우리 사회에 들어온 이상 현재 본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가상화폐를 바라보는 인간들의 시선과 욕망이며, 결국 가상화폐와 우리는 그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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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인간의 인간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당신의 질문은 방향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복제인간을 다루는 인간들의 인간성이 더 현실적이고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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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의 맛을 감별하고 묘사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 모든 경험을 소환하는 만화 속 소믈리에만큼은 아니겠지만 약간의 노력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우선은 입안에 먼저 닿았던 시원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한다면


장르적 특성보다는 특정 화면들의 프레임이 더 눈에 들어오곤 했었다. 인상적이었던 몇몇 이미지들이 기억에 남는다. 눈이 덮힌 고글을 끼고 파묻혀 있던 로버트 패틴슨의 클로즈업 첫 장면도 그렇지만 사진 잘 찍는 인플루언서의 SNS에서 꺼낸 듯한 멋진 장면들이 종종 화면을 채우곤 했다.(해당 장면들이 꼭 그렇게 멋지게 찍혔어야 했는가는 별개로 보자) 출력(?)되어 나오는 미키가 받침대가 없어 가래떡처럼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장면마냥 살짝살짝 후추처럼 뿌려진 유머들은 보는 맛을 더해준다.(대놓고 진행되는 풍자와는 별도로) 하지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은 주인공 미키를,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을 그려낸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였다.(넘버링으로 따지면 18명의 미키를) 영화 23 아이덴티티에서 수많은 다중인격체를 놀랍도록 현실감 있게 묘사한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와는 또 결이 달랐다.(굳이 비교한다면 아서와 조커를 동시에 연기했던 호아킨 피닉스가 더 가까울지도)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미키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미키가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그 외에도 좋은 부분들은 여럿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캐릭터의 개성이 각자 다 달랐기에 지루할 틈도 없었다. 특히 스티브 연이 연기한 티모는 정말 야물딱지게 얄밉다고나 할까... 연기도 연기지만 캐릭터의 설정이 살려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마샬과 일파처럼 다소 만화적인 캐릭터가 배역의 중심에 있고, 영화의 배경 자체가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이 영화는 자칫 사실성에서 멀어질 수도 있었다. 그 안에서 티모라는 배역이 지닌 현실성에 힘입어 시나브로 멀어질 뻔했던 사실성을 우리들 곁으로 다시 끌어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다소 난잡할 수 있었던 부가적인 스토리들은 나름 깔끔하게 가운데 정렬로 맞춰져 있었으며, 미키17과 미키18의 동시등장 화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그려지고 있어서 좋았다.(반대로 두 미키가 동시에 등장함에도 서로 다르게 보여 더 좋았다. 이건 영화적 기법보다는 그의 연기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스토리 전개에서 진부한 표현방식이 다소 있었지만 덕분에 복잡함을 풀어내는 불필요한 수고 대신 다른 부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결과적으론 그것 또한 괜찮게 느껴졌다.


미키17 (04).jpg 미키 17 스틸컷 중




잠시 숨을 고르고... 본격적으로 한번 얘기해보자. 일단 일차적으로 혀에 남은 맛이 있긴 했다.


처음에 얘기했던 바로 돌아간다면, 관람 직후 이 영화의 맛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그간 봉준호 감독의 장점이라고 여겼던 부분에서 (그래서 이 영화에서도 당연히 맛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던 부분에서) 별다른 미각적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의문스러웠던 연출은 바로 메시지의 표현방식이었다. 소심한 미키17의 행동과 달리 영화에선 메시지1부터 메시지18까지 우리 사회가 이전에 출력해 놓은 온갖 메시지들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자태로 줄줄이 등장한다. 당당하게 스크린 앞으로 걸어와선 교과서적인 발언을 하나씩 남기고 무대 위 워킹을 끝낸 모델처럼 되돌아 들어가곤 한다. 어떤 면에선 이 메시지들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 아닌가 싶기도 했으며, 비슷한 의미로 '이 영화는 PC주의 종합선물세트인가...' 싶은 느낌도 조금 받았던 것 같다.


▪︎...

사회적 약자이자 피지배계층에 대한 사회의 착취구조, 더 나아가 죽어도 되는 이와 죽어서는 안 되는 이를 구분하는 사회의 폭력성이 영화 전반에 등장하는 주된 메시지17이라고 본다면

엘리트주의로 대변되는 인간 계층 구조에서 꼭대기에 있는 이들의 '엘리트성'이 참혹적인 부실함에도 맹목적 찬양을 통해 충분히 부양될 수 있음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대놓고 풍자하고 있고,

비슷한 맥락에서 백인 우월주의나 우생학적 관점의 유치함에 대해서도 일침을 날려주고,

외계 행성 생명체와 인류의 조우는 예측 가능한 그림 그대로 문명과 비문명의 우월관계로 정의하려는 이들이 있지만 그 경솔하고 가벼운 시선은 묵직한 반전을 통해 가볍게 눌러버리고,

살인장면처럼 극단적인 개인의 취향과 욕망에는 필요 이상의 고화질이 사용되지만 다른 문명이나 공동체를 바라보는 화면은 저화질로밖에 나타나지 않는 편협한 시각도 꼬집어주고,

오히려 돈이나 쾌락과 같은 원초적이고도 강렬한 욕망은 어떤 금기의 울타리로도 막아낼 수 없음을,

음식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 소스지만 그 물질에 투영되는 욕망은 반대로 저급할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 욕망을 기어코 성취하고자 뿌려대는 행위들은 또 얼마나 추잡한 악취를 풍기는지를,

착취엔 가해자 따로 피해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평범한 가해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음을,

한정된 자원 통제라는 억압적 행위도 홍보용 이미지 필터를 거치면 가치 있는 정책처럼 꾸며질 수 있음을,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나 신성한 종교라는 외피가 추악함을 감추는 이미지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음을,

그리고 미디어나 언론이 그 과정에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성을 출산의 도구처럼 바라보는 시각의 편협함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페미니즘적 인식까지...


메시지1부터 메시지5까지... 인가 싶다가 계속해서 메시지10과 그 뒤까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모두 기회만 노리고 있다 이때다 싶으면 바로 손들고 나오는 형국이었다. 표현과 발언도 너무 직설적이라 특별히 고민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런 등장의 최종판은 아마 영화 후반부 나샤가 마샬과 일파를 향내 욕설과 함께 거칠게 뿜어내는 연설이자 설교(?)의 장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


미키17 (06).jpg 미키 17 스틸컷 중



우리가 알다시피 다양한 은유의 방식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고 또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진 봉준호 감독인데, 기생충처럼 하나의 사회적 주제를 드러내고 설명하는데 영화 전체를 아낌없이 할애하며 모든 스토리의 전개와 결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구성되도록 만들기도 했었는데 왜 이 영화에선 이토록 직유로 가득한 수많은 메시지와 직설적 풍자 위주로 화면을 채웠을까... 왜 스스로의 장점을 이런 방식으로 파괴(?)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 아쉬움은 아마도 여기서 기인했을 것이다.


미키17 (07).jpg 미키 17 포스터 중




개인적으로 영화 포스터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이번 포스터가 참 재미있었다. 그러다 살짝 잊고 있던 미키17이 떠올랐다.


이번에 공개된 영화 포스터를 보면 독특한 컨셉의 포스터들이 바로 눈에 띈다. 메인 포스터 외에 부가적인 포스터들이 여럿 있다. '추워도 일해야지', '아파도 일해야지', '더러워도 일해야지' 등의 타이틀이 포스터마다 하나씩 달려 있고 해당 카피 문구에 어울릴 법한 미키의 작업중 모습이 배경으로 채워져 있다. 영화의 주제의식도 담고 있으면서 매일매일 출근하는 일상을 살고 있을 수많은 이들의 심정을 건드리는 문구이자 해학과 풍자도 곁들이고 있는 흥미롭고 호감가는 포스터들이었다. 이는 영어로 번역(?)된 (오히려 영어 포스터를 한국식으로 새롭게 바꾼 것일 수도 있다.) 포스터를 보면 더 분명해지는데 해당 카피 문구들은 모두 'This Job is ~'라는 식으로 쓰여 있기에 풍기는 뉘앙스와 담긴 감성이 확실히 다르다.


미키17-5.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포스터 안에는 미키들이 가득하다. 아, 맞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범죄추리극이 아니라 결국 사랑 이야기였던 것처럼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 역시 미키로 대변되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가져온다면... 사회문제에 대해 늘 고민하는 감독이라는 인상으로 인해, 일차적으로 나열되는 사회적 메시지들에 너무 시선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중요했는데 말이다.


앞서 복제인간의 인간성보다 복제인간을 대하는 인간들의 인간성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포인트일 수 있다고 얘기했던 바가 있다. 자연스럽게 미키와 같은 익스펜더블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감독의 주제의식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단순화시켜 얘기하자면 '사회'가 주된 관심사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현실을 두고 주된 시선이 향하는 곳을 사회가 아닌 '사람'으로 바꾸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사회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더 필요한 부분은 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미키로 대변되는 우리들 자신이자 각 개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져 온다고 했던가, 사회가 비인간적일수록 애써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소소한 노력들이 소중해진다.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새로운 그림으로 바뀌는 이미지처럼 이 영화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미키17 (09).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우리가 비판하든 추종하든 부조리한 사회는 늘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다.

그 부조리한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나'가 있다.

그 '나'들의 인간성이 훼손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진짜 필요한 질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속 다양한 메시지들은 어쩌면 미키가 수행했던 다양한 직업들 속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일들이자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부조리함과 무척이나 닮았다. 영화가 단지 그 부조리함에 대해 나열하는 것으로, 그 부조리함에 대해 교과서적 답변을 꺼내놓는 것으로 할 바를 다했다 여겼다면 아마 정말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답을 몰라서 사회가 부조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은 그게 어떤 사회이건 그 안엔 숨쉬며 살아가는 수많은 일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니 어쩌면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미키들 옆으로 가서 직접 물어보고 들어보라는 얘기였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건 영화 밖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한다.


한 개인이 집단과 사회의 소모품(expendable)이 아닌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되기 위해 부조리한 사회의 변화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영화는 부조리한 사회는 생각보다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변화의 대상을 사회로 돌리는 순간 우리 자신은 의외로 주체에서 객체로 전환되고 만다. 질문을 던지는 것도 우리고, 답해야 하는 책임도 우리에게 두어보자. 부당함이 난무하고 힘없는 이들일수록 그 부조리함의 파도에 쉽게 휩쓸릴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그건 자기 자신에게도 물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미키17 (10).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그 말의 현실화 버전이 바로 미키17과 미키18로 구현된 멀티플 상황이었다. 그렇게 보면 그 둘이 서로를 바라보고 상호작용하는 장면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상황과 매우 닮았다.


우리가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고민이 영화의 주된 뼈대임에도 이를 사회구조적으로 풀어내는 형태로 영화의 방향을 잡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풀어내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감독이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 사회의 구조가 작동하는 형태는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구조는 마치 유기체처럼 그 구조에 봉사하는 이들의 욕망을 흡수하고 활용해 지속해서 구조의 세부단위를 강화해 나간다. 폭력과 착취의 사회구조는 그 구조를 계속 작은 단위로 재생산해내게 되기에 독재자 하나 제거한다고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로 만들고, 거기서 만들어진 피해자 역시 다시 자연스럽게 가해자가 되어 살아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사람들 역시 얼마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희생을 강요당하는 미키17에 대해 (독재자와는 달리) 사람들은 가끔 안쓰러운 마음을 품기도 하지만 결국 미키17 앞에 가서 그에게 묻는 말은 죽을 때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이었다. 결국 당사자의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순간을 끄집어내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행위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SNS가 활성화되고 비대면 관계가 늘어나면서 한편으론 개인적 욕망의 추구에 쓰일 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조차 유희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더 나아가 수익모델의 소재로 삼고자 하는 이들의 뻔뻔한 행태가 더 늘어나고 있는 현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매우 씁쓸했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변화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어떤 구조의 사회에서 살아가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이 스스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어디쯤에 있는지 먼저 가늠해야 한다. 아프다고 인식하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아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것과 같다. 지금 나의 상태가 어디쯤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질문이 필요하다. 영화에선 사람들이 미키에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반복적으로 묻는다.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의 외형과는 다른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바쁜데 이번 명절에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부모님의 말을 액면가 그대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물론 부모님의 본심은 오해의 소지가 없다. 물어야 할 대상은 그 말을 듣고 혹시라도 심적 갈등이 생겼는지에 대한 나 자신이다. 부모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내 마음은 보다 쉽게 현실적 조건에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미키가 받고 있지만 미키 입장에선 달라질 것이 없었다. 미키의 입장에서 운명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함의 굴레에서 무한 반복이었다. 달라질 수 있는 운명은 죽어야 할 의무가 없는 이들이었다.


죽어야 하는 역할은 미키에게 주어졌지만 살아야 하는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이제 미키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미키17 (11).jpg 미키 17 포스터 중




영화는 그 고민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미키를 등장시키고 있었다.


부당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때론 극단적인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는 미키18에 대해 우리가 나름 희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또한 그런 마음을 늘상 가슴 한켠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다양한 이유로 인해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미키18의 행동이 거칠고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그 행동의 이면엔 '자기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원초적인 목적성이 담겨 있음을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그래서 미키17을 바라보며 쌓였던 답답함이 일부 해소되기도 하는)


그렇다고 미키17의 존재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키18로 인해 미키17의 진정한 의미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 매우 소심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진 미키17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온몸으로 감당해내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불평을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질책과 죄책감으로 끌어들여 해소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선 안타까움과 별개로 애가 타고 속이 뒤집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연결고리와 착취의 사슬이 미키17에 이르러서야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멈추게 된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착취의 구조를 바꾸어내는 영웅적인 일을 해낸 것이 아님에도 그에게 다다라 그러한 행위가 더이상 다른 사람들로 연결되어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점은 놀랍다. 폭력의 작동엔진을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 사이의 구조적 위상차로 쉽게 규정하려고 하는 이들의 순진한(?) 인식에 대해 티모의 사례를 들어 얼마든지 약자들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힘의 작동은 거시적 구조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관계에서도 쉽게 나타날 수 있음을 감독은 보여주었다. 미키17만이 예외적인 존재였다.


미키17 (16).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죄책감은 어머니와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뱃속을 통해 태어난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이 '죄책감'이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미키17한테만 있었다.


미키17의 죄책감은 미키를 나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의 인간성이 흩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중요한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관심과 인정욕구에 목마른 마샬과 소스에 집착하는 일파의 욕망처럼 미키17 역시 배고픔을 벗어나고픈 원초적 욕망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평범한 욕구에 이끌려 지도자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만찬에 참여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나샤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질책하는 이이기도 했다.


욕망을 추구하는 가운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는 존재가 어떤 면에선 가장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일텐데, 그리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떠올려봐도 가장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일텐데 어찌된 일인지 과한 욕망을 거침없이 뿜어내며 심지어 신실한 종교인으로 자부하는 이들은 죄책감이란 것이 1도 없고 반대로 모든 욕망의 사슬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미키17만이 넘치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형국이었다. 어떤 면에선 가장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미키17이 오히려 가장 인간성이 덜 훼손된 보통의 인간이었던 셈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유발하는 죄책감이란 요인이 한편으론 자신의 인간성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미키17 (17).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약한 데서 강한 것이 나온다는 말은 이럴 때 해당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미키17의 나약함은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면 선함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이에게 같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당함에 대해선 무지하더라도 다른 존재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에 대해선 잘못되었다고 인식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을 (설사 인간이 아니더라도) 별다른 편견 없이 동등하게 바라보고 상대방을 이용가치로 환원시키지 않을 수 있는 시선의 근본은 미키17이 근본적으로 선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들에 의해 이용될 소지가 클 뿐이지 선함 자체는 결코 약함이 아니다.


결국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에 '죽은 시인의 사회'가 있는데 그 영화의 마지막엔 부당한 결정에 저항하는 행동의 상징으로 몇몇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 상징적인 짧은 시구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매우 억압적이고 옥죄는 분위기 속에서 진정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내내 가장 나약해 보였던 토드 앤더슨이 보인 행동이었다. 그가 평소 용기 충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한' 마음에 비춰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음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키17도 그러했다. 인간에게 이런 선함을 빼버린다면 그건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는 익스펜더블(Expendable)로 분류되는 존재였지만 아이러니하게 인류가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될 소중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미키17 (12).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미키17 vs 미키18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 미키17과 미키18은 물리적으론 복제인간이었지만 어쩌면 미키 반스 안에 존재하던 독립된 자아들의 형상화이기도 했고,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이중적 모습의 외면화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다고 본다. 미키17과 미키18은 당연하겠지만 서로를 다른 존재로 받아들였고, 그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차이만큼 우리도 서로 다른 미키17과 미키18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외모가 같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둘다 나샤를 좋아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하나도 같은 것이 없어 보이기도 했으니까.


미키17 (18).jpg 미키 17 스틸컷 중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느냐와는 별개로 그들의 존재를 구속하는 외부적 규정이 있었다. 멀티플이라고 부르는 이 상황은 복제인간이 둘 이상 있을 수 없으며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모두 제거된다는 엄격한 규정이었다. 복제인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규정이었다. 미키18 역시 멀티플이라는 규정 아래 처음엔 미키17을 죽이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멀티플 규정을 제외하고 미키18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미키17은 나약해서 매번 당하기만 하고, 자신을 지킬 줄도 모르며, 필요 이상의 죄책감으로 자신을 좀먹는 존재였다. 미키18의 입장에서도 미키17은 없어지는 것이 훨씬 나은 존재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키17에 대해 연민(?)을 품은 듯한 시선을 보일 때가 살짝살짝 있었다. 그 시점들은 모든 미키 중에서 가장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했던 미키18이었음에도 어떤 면에서 그가 결국 지키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 미키17이 있음을 인식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순간은 바로 죽음을 선택한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미키의 모든 죽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죽음이었고, 사회나 집단에 의해 강요된 죽음이었지만 마지막 순간만은 달랐다. 미키18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고,(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 했던 자를 벌주는 것이 마땅하기에) 이번만은 외부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어쩌면 자신이 되고 싶은 존재를 위해) 선택버튼을 눌렀다.


미키17 (19).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미키17 & 미키18


그렇게 우리는 스크린에서 미키18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최소한 물리적인 의미에선 그러했다. 하지만 미키18의 존재는 이제 재출력이란 형태를 통하지 않더라도 미키17 안에 남아서 존재하게 되었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이것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남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키18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미키17의 존재를 받아들인 것처럼 마지막엔 미키17이 미키18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 순간을 맞이했다.


영화를 보는 시점에선 '왜 이 장면이...' 싶었던 미키17의 꿈은 결국 그걸 얘기하고자 하는 거였다. (해당 장면이 휴먼 프린트 기기가 폭발하는 장면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었으리라) 미키18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독백과 성찰을 통해 현실에선 하지 못했던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미키17은 이제 미키18도 자기 안에 품을 수 있었고, 드디어 단순 복제품이었던 미키17을 넘어 스스로 성장한 '미키 반스'라는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미키17 (21).jpg 미키 17 스틸컷 중(편집)




SF 수트를 입었지만 결국 옷보다는 옷을 입은 사람


앞에서 이 영화가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기존의 SF 영화와는 다르다고 얘기했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깊은 감독이었기에 이 영화 역시 처음엔 그렇게 읽혔으나 이 영화에서 감독은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보다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부조리함이 가득한 사회 속에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번 생각해보자. 부조리한 사회가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인간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쉽게 받아들이면 어떤 면에서 그것만큼 비극적인 결론이 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조리한 사회는 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에. 결국 인류의 모든 삶에서 인간적인 존재로 살아갈 가능성은 제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키17 (22).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그리고 이건 단지 사회의 부조리함 때문에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다. 특히나 현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기술의 발전이 많은 부분에서 인간성을 위협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A라는 생명체에서 생명체 B의 신체기관 일부를 키워내는 기술은 이미 현실화되었다. 1990년대 말, 한 실험결과 보도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다. 생쥐의 등에 달린 커다란 귀 사진은 그 이질적인 이미지만큼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기술에 투영되어 있는 우리의 욕망이 다음엔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그 형태가 얼마나 이질적으로 느껴질지 염려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AI의 발전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변화이기도 하다. 최근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전쟁에서 AI 기술을 이용한 판단이 인간의 판단을 대신해 생명 사살의 명령에 관여하고 있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현재는 전쟁이라는 그나마 인간사의 국소적인 측면에서 활용되고 있다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멀지 않은 미래에 AI가 더 많은 영역에서, 더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판단을 대신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답을 찾고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더 많은 논란의 기술들이 도입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적절한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어쩌면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다루는 과정에 개입되고 표출되는 인간의 욕망이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꼭 기술이 비윤리적라는 이유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위한다는 기술이 반대로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음은 특별히 새롭거나 놀라운 통찰은 아니다. 영화에도 등장했던 휴먼 프린팅 기술은 인류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였다. 실제 목적대로 작동했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도 그려졌다. 하지만 그 안엔 여전히 수용하기 어려운 '비인간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기술이 활용되는 과정에서 기술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한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비인간화되어 간다는 인식도 하지 못한채 기술과 체제에 순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미키17 (23).jpg 미키 17 포스터 중(편집)



미키의 넘버링이 왜 늘어났을까? 간단하다. 다친 미키를 치료하는 것보다 재출력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미키1의 넘버링이 미키17까지 커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어떤 면에서 기술 하나하나에 '비인간적' 딱지를 붙이거나 떼는 과정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이 충분히 유지될수록, 그래서 공동체의 인간성 지수가 높아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일지도 모른다.


인간성을 상실한 채로 사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도 공동체의 입장에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버리는 순간 나의 인간성도 숨을 거두는 것이다.

시신을 태웠던 용광로는 육체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 태워버릴지도.


마지막 순간에 마샬은 미키18을 향해 내뱉는다.

"우리 모두 살려고 이러는 거잖아."

그런데 그 말엔 누락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지가.




미키17 (20).jpg 미키 17 포스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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