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과 희생제의

-아포칼립스; 인류 최후의 날-

by 혁이아빠

항암의 부작용으로 발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흐리고 축축한 날씨와는 대조적이다. 운동을 나가지 않을 완벽한 핑계가 갖춰졌다. 피로까지 몰려오는 이런 저녁엔 책을 읽기엔 체력이 조금 모자란다.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모든 것을 보여주며 설명까지 해주는, 그런 블록버스터를 볼 작정이었다.


다운로드 (2).jpg

최근 개봉작, 아포칼립스. 제목에 끌린 이유는 단순했다. 코로나가 서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작년 봄 즈음, 영국 체류 시절 윗집에 살던 할아버지에게 이메일로 안부를 물으니 인적 끊긴 마을 분위기가 ‘아포칼립스’ 같다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포털에서 정보를 대강 훑어보니 인류와 인공지능(AI)의 한판 대결이라고 한다. 흐름을 대강 상상해본다. AI가 평소 상상하던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신개념 무기를 장착하고 나와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겠지, 영웅적 인간 캐릭터들이 그 난관을 힘겹게 뚫고 승리를 쟁취하겠지, 행간에 손발 오그라드는 휴머니즘이랄지, 아니면 AI에 대한 인간의 우위라는 메시지가 제시되겠지. 이런 대강의 기대를 하고 리모콘을 눌렀다.


결론적으로 기대는 어긋났다. 인간 주인공은 단 2명이고, 대사도 단 두 마디이다. 오로지 시각에 의존해야 하기에 상당한 집중력과 인내력을 쏟아야 했다. AI 로봇은 인간생존자를 '언어'로 감지해 추격한다는 예고편의 설명이 무슨 의미인지 한 번쯤 생각해봤어야 했다. 말을 하면 바로 죽임을 당하니 대사가 없을 수밖에. 과묵한 독일에서 만든 영화답다. 그나마 그 설명조차 못 보고 영화를 틀었다면 이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AI가 인간생존자를 언어로 찾아내 사살하는 장면은 단 한 번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가 언어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우면서 친절하게 긴장과 흥미를 이어갈지 자못 궁금해질 것이다. 등장인물 단 2명의 관계로 풀어갈까. 우연한 만남 후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 놓이지만, 어떤 계기로 극적으로 다시 만난다는 식의 서사를 풀어갈까. 거기에 화려한 전투와 액션, 기상천외한 AI의 만듦새와 진화가 보여주는 시각효과가 적절히 가미될까. 그런 소박한 기대들도 다 무너진다. AI가 간혹 스산한 기계음을 내며 등장했다가 폭발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핵심 볼거리는 아니다. 중간에 채널을 돌리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관람료를 이미 냈기에 극장에 왔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감동은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을 보며 지나갔던 장면들을 서서히 복기하는 과정에서 밀려왔다. 퍼즐을 맞추다 보니 바벨탑 신화처럼 생긴 영화였다.


언어를 통한 협력이라는 무기로 다른 모든 생태계 종들의 꼭대기 자리에 오른 호모 사피엔스. 이들의 오만을 꺾기 위해 고대 바벨탑 신화에서 야훼는 언어를 흩어버리고 서로 소통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인간은 다시 기어올랐다. 커뮤니케이션은 더욱 활발해졌고 그렇게 누적된 집단지성으로 AI를 탄생시키게 된 것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재다.


이에 현대의 심판은 보다 잔인하게 언어를 압살한다. 고대에는 언어를 여러 갈래로 흩어버리기만 했다면, 이제는 AI가 언어, 특히 구음을 찾아다니며 말살하는 것이다. 언어를 잃은 인간은 협력할 수 없고, 협력 없이는 스스로 만들어낸 신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도 그 협력의 난맥상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둘은 각기 미국인과 러시아인이다. 전직 군인인 미국인 주인공(남성)은 AI를 피해 도망쳐다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역시 군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인 주인공(여성)은 홀로 AI를 파괴할 수 있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는 서로의 언어를 몰라 필담으로도 소통할 수 없고, 그래서 신뢰도 협력도 없다. 미국인은 그저 지금껏 해왔던 대로 다시 은신처를 떠난다.


이 영화는 인간이 다시 만든 바벨탑으로 멸절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묵시이다. 심판 앞에서 인간은 그대로 멸절되고 말 것인가. 최후의 1인이 AI에게 살해되고 GAME OVER라는 자막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원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오락기에 100원을 추가로 넣고 한 판 더 붙어야지. 누구나 심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간형이 살아남아 인간의 역사를 이어가길 원할 것이다.


영화는 그 결말을 충실히 보여주었다. 주인공들은 현대의 바벨탑, 즉 AI를 결국 파괴하고 심판을 중단시킨다. 고대의 바벨탑은 인간의 언어가 흩어지며 무너져 내렸다면, 이번엔 역으로 흩어진 언어를 모두 모으는 과정을 통해 바벨탑(AI)이 무너진다는 게 인상적이다. 남자는 도망치다 다시 돌아온다. 여자는 보이스레코더에 세상의 모든 구음을 모아두었었는데, 남자가 그것을 AI 중앙관제탑에서 방송한다. 그 언어들을 듣고 모든 AI의 살인무기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폭발. 여성이 보관하고 있던 핵무기가 모여든 그들을 일소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문제는 과정이겠다. 그저 인간이 AI보다 좀 더 우월해서 이겼다는 식이면 일차원적인 블록버스터에도 미칠 수 없으니 곤란하다. 곰곰이 돌아보니 영화가 그 과정을 풀어가는 방식은 심판과 희생을 통한 제의의 서사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희생제물은 주인공 스스로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희생제의의 공식은 나 대신 다른 제물을 희생시켜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반면, 두 주인공의 희생은 속죄라기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여자는 다쳐서 자신이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을 희생하여 시간을 벌고 남자에게 바통을 넘긴다. 남자는 그 희생을 발판으로 AI 중앙관제센터에 도착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핵무기를 작동시킨다. 이 희생이 어째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냐고? 아까 언급했듯 이 영화에서 대사는 단 2마디이다. AI가 자신을 발견하여 화기를 발사하도록 유도하여 자신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칠 때 등장한다. 바로 이것.

'나 여기에 있다!‘

(2021. 5. 11.)

매거진의 이전글경계와 탈주의 아슬아슬함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