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타루, 그리고 1917
끝까지 보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다. 그저 컨디션이 나빠 앉아있어야 했던 시간이 무료했기 때문에 보기 시작했으므로.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고 말았다. 멈추지 못한 것은 순전히 주인공들의 눈빛 탓이다. 호타루에선 주인공 여배우의 눈이 너무 선해보여서. 그리고 1917에선 주인공 병사의 표정과 눈빛이 정말 영국 어느 작은 도시 거리에서 마주친 적 있었나 싶을 만큼 평범하고 무심해 보여서.
그 눈빛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점차 설득력을 갖추어나갔다. 그리고 끝날 때쯤에는 처음의 그 눈빛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두 영화를 며칠의 시간차를 두고 시청했지만, 두 눈빛이 같은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딧불이란 뜻의 호타루. 한국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기억하는 일본인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부부는 평범한 어부 가족처럼 보인다. 여느 부부와 다른 건 아이가 없다는 점, 그리고 서로 조금 예를 갖추는 것 같다는 점.
그들의 기구한 사연은 영화가 전개되며 밝혀진다. 그 둘 사이엔 잊을 수 없는 한 존재가 있었다. 김선재. 일본 이름 가네야마. 그는 가미카제 특공대 소위이자, 여자의 약혼자였다. 사지로 김선재가 출격한 후 여자는 절망에 주저앉지만, 김선재의 부하였던 남자는 그녀의 삶을 붙든다. 그리고 평생의 반려자로 살았다. 신장병으로 여성의 삶이 꺼져 갈 즈음, 그들은 김선재의 유족들을 찾아 안동 하회마을로 향한다. 그리고 김선재의 마지막 말을 유족들에게 전한다.
“나는 대일본제국이 아닌 조선과, 자신의 약혼녀를 위해 출격한다.”
다음 1917. 1차대전을 상징하는 지리한 참호전이 배경이다. 참호를 버리고 후퇴하는 독일.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다. 통신이 끊겨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할 길이 없다. 결국 하루 거리를 직접 뛰어가 명령을 전달하는 영국 병사의 이야기.
원래 출발인원은 둘이었다. 주인공 윌리엄은 임무를 맡은 전우를 그저 따라나선 것이었을 뿐. 그런데 도중에 전우는 추락한 독일 공군병을 도우려다 도리어 살해당하고, 그저 따라나선 윌리엄에게는 지령을 전달하는 기존 임무 외에 숙제가 하나 더해진다. 전방에 있는 전우의 형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것. 전우들의 시체 더미를 헤쳐가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윌리엄은 임무를 완수한다. 전방의 부대는 위험한 공격을 멈추었다. 죽은 전우의 형은 동생이 고통받지 않고 떠났고, 바로 자신의 앞에 선 사내의 목숨을 건졌으며, 좋은 군인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렇듯 두 영화는 전쟁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물론 각각 일본과 영국의 시선에서 그려졌다. 특히 호타루는 대한민국 국민이 보기에 여전히 불편한 지점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아로새겨진 집단의 상흔을 그저 개인의 애틋한 사랑으로 희석해 보려는 의도를 느낀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두 영화 모두 철저히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개인에게만 렌즈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거나, 식민지배의 부조리에 맞서 싸웠던, 그래서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영웅이 주인공이 아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어 평범하게 스러져가고 소모되고 희생된 소시민의 이야기도 아니다. 물론 희생도 나오지만, 두 영화의 관심은 희생을 재료로 호국정신을 함양하려는 선동에 있지 않다.
영화는 희생되지도 못한, 그저 희생을 알리려 끝끝내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이다. 호타루 속 주인공은 45년의 시간을 김선재를 품고 살았고 그 마지막 말을 유족에게 전했다. 1917의 주인공은 함께 가던 전우의 부탁을 전달하기 위해 무수한 총탄 속을 건넌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가슴에 조국이나 전쟁의 승리 같은 뜨뜻미지근한 개념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전우가 남긴 목소리만 뇌리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윌리엄이 전선을 향해 뛰는 전우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거슬러 가고 있기에 그를 따르는 카메라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 방증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 그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전쟁을 살고, 또 살아남은 이들의 시선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집단으로서 인간은 전쟁을 통해 삶의 의미, 이유가 철저히 짓밟히는 경험을 하고도 다시 살았다. 전쟁도 삶도 돌아볼 틈도 없이 새로 짜인 구도 속에서 체제 경쟁을 하며. 사람이 사라진 헛헛한 가슴에 이승복 어린이와 같은 신화를 우겨넣으며, 상대를 향한 증오를 연료 삼아 그렇게 살았다. 체제 경쟁이 끝난 뒤에는 승리와 번영의 신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개인은 그 긴 시간을 숨죽여 기다렸나보다.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어도 아무 특별한 일이 없다는 보고가 올라가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무심함,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끝없는 소모가 반복되는 1917년 참호의 지옥도, 그리고 명확히 보이는 패배 앞에서도 청춘들을 비행기에 태워 화염 속으로 던져넣는 인신공양을 의문에 부치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린 것일까. 아니, 그 질문은 진작부터 던져왔지만 아직도 해갈이 되지 않아 계속 묻고 있는 것 아닐까.
어쨌든 반가웠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한 명의 죽음을 돌아보는 게 전쟁의 부조리를 벗어나는 탈출구임을 알아보는 그 시선이. 영화를 빌어 말하자면, 살아남은 이들은 그 개인의 죽음을 어떻게든 가족에게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낸 것이다. 비록 어이없는 개죽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구한 게 아니라 전우를 살려낸 용감한 이였다는 것을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 그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 진실을 전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삶, 살아남는다는 목표만 붙들고 1년이 지나갔다.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듯 내 삶에 암이 들어왔다. 무고하게 전쟁에 던져졌다 살아남아 오랜 시간을 건너온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병마를 이기고 살아내야 할 이유는, 전해야 할 소식은 무엇일까 가늠해본다.
이제야 이런 영화들이 나온 것처럼 살아낸 이유를 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다만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같은 영웅담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그 어렵다는 담도암을 만나 이렇게 불굴의 의지로 이겼습니다'가 묘비에 새겨질 나의 스토리는 아니길 바란다. 지금은 그저 나도 숱하게 많은 암 환자였고, 똑같이 두려웠고 방황했다고 말하고 싶다.
(2022.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