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성장소설이니, 알을 깨고 나온다든지, 무언가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달지 하는 것들이 젊은 날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했다. 학생까지는 그런 주제로 진지하게 밤을 새워가며 떠드는 것이 허락된다 손치더라도, 생계를 내 손으로 이어가는 이른바 경제적 독립 이후에도 그러고 있는 것은 반칙이었다. 민망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제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옷이 맞지 않는다고 아이처럼 투정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린이에게 어른의 세계가 금기였듯, 어른이 된 내게는 성장소설이 금기였다.
올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손보미의 '불장난'은 나의 그 뿌리 깊은 오해를 엎으면서 시작한다. 소설은 일인칭의 주인공이 몇 달 전 이혼을 계기로 초등학교 시절 불장난이라는, 자신의 생장점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 끝에 벌인 불장난이 어린 자신의 허물을 소각하고 독립한 계기였음을 확인한다. 그 말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고,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 아니겠나.
최백호의 노래처럼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이니 상처니 하는 것들을 달콤하게 말할 수 있겠냐 싶었는데, 나와 동갑내기 소설가 손보미의 소설이 참 반갑다. 40이 넘어 어린 시절을 다시 돌아가 들이판다고 해서 부끄러울 게 없다고 대문호가 도장을 찍은 셈이니. 이제 나에게도 어린시절로 돌아가 미처 풀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 하고 오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부모의 이혼과 이사. 모두 초등학생 소녀의 의지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이벤트이다. 동시에, 자신이 애써 구축한 작은 세계, 가족관계는 물론 동네와 학교 친구, 익숙한 공간 등등을 일순간에 빼앗기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정신적 부도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 그녀는 새로운 세계에 뿌리내리려 발버둥친다. 그리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의 가면을 벗고 어머니 대신 들어온 '그녀'와 맞선다.
전학 간 학교에서 마주한 금기들은 특별하다기보다 친숙하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봤음직한. 중학생 오빠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친구, 비밀의 장소 숙직실, 그 안에서 벌어진 어깨와 가슴을 드러내는 패션쇼, 그리고 그때 묶었던 손수건. 그녀는 그것을 욕망하면서도 부끄럽게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집에서 마주한 금기의 영역들, 부모의 방, 접힌 이불, 동침, 양주, 담배 등 어른들의 세계. 주인공은 그 부모의 세계에서 부주의하게 흘러나온 라이터로 그 세계들을 불살라 버린다. 그 투쟁의 기억들은 몇 년 뒤 중2 때 교내 글짓기 대회에 출품한 '불장난'이란 이야기를 통해 재배열되며, 그 인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주체가 탄생한다는 게 소설의 골자다.
참 이상도 하지. 소설이 허락했기 때문이었을까. 난 이틀이나 같은 꿈을 꾸었다. 인셉션처럼 꿈속에서 꿈을 또 꾸어 두 번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틀 밤 연속 같은 장소가 꿈에 나와서 그러는 것인지 벌써 흐릿하지만. 꿈 속에서 난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손보미가 만든 세계와 비슷한 처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난 전학을 왔고 부모님은 새롭게 시작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자습을 시키고는 옆반 선생님과 자주 외출했다. 그리고 방과 후에 나는 저녁시간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이틀간이나 꿈에 나왔던 그곳은 바로 그때 다녀야 했던 학원이었다. 뺑뺑이란 요즘 말이고, 당시엔 한 학원에서 주산, 피아노, 웅변, 영어를 한꺼번에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가르친 것 같진 않다. 그저 방과 후부터 저녁시간까지 내가 학교 주변을 배회하지 않도록 묶어두는 것이 과업인 듯한 그런 곳이었다. 난 웅변 교재를 펼쳐놓고 '제스처'란 무엇인가 설명한 글을 성경처럼 필사하기도 했고, 혼자 읽지도 못하는 영어책을 펼쳐놓고 있기도 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지나갈 때 난 장난감 가게가 영어로 토이 숍이 맞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토이 스토어라고 했다. 친구들은 내가 틀렸다며 놀렸다. 다른 한편에선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집에 갈 땐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헤이, 안녕히 계세요' 이런 구호(당시의 어린 나도 그걸 외며 참 부끄러웠다)를 외치게 하는, 뭐 하여간 그런 곳이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선생님은 둘이었는데 그들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앉아 있는 교실에 없더라도 다른 교실을 돌아다니며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당시엔 업장과 사는 곳이 일체형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이 부부였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학원 교실 한편에 딸린 살림방에서 같이 살았다. 의미도 잘 모른 채 무언가를 달달 외는 방식의 웅변 연습을 하다 말고 왜 궁금증이 발동했을까. 난 그 살림방을 들여다보았다. 그 방에서 본 선생님들의 표정은 기억이 안난다. 아마도 잊거나 덮으려 애썼던 것 같다. 아마 어른의 세계를 침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꿈에서 다시 소환되는 것을 보니.
꿈 속에서 나는 다시 그 학원을 찾아가 그 계단을 올라갔다. 학원은 그대로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교실들도 텅 비어 있었고, 내가 발을 들였던 살림방도 비어있었다. 깨고나니 허탈했다.
혹여 그 학원이 지금도 있을까 싶어 한참 네이버 지도를 켜놓고 거리뷰를 보며 당시 초등학교 부근을 뱅뱅 돌았다.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의 기억 속 거리풍경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살던 곳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인지 통으로 비워져 있고, 집에 가다가 길을 잃곤 했던 전통시장만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학원 이름도, 위치도 기억나지 않아 결국 탐색은 포기해야 했다. 그 살림방에서 보았던, 선생님들이 다니던 교회 이름만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교회는 아직 그 근처에 있었다.
32년 전이니, 그 두 분이 당시 20대였다 하더라도 지금은 은퇴하실 시점이긴 하다. 학원이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지. 그리고 찾는다한들, 봉인된 내 무의식이 짠 하고 모습을 드러낼 리도 만무하건만. 헛된 탐색이었다며 시린 눈을 비비며 지도 창을 닫았다.
아마 지난 2주간 두 번에 걸쳐 천천히 읽었던 손보미의 소설이 그 꿈을 꾸게 했고, 날 지도 위에서 헤매게 한 것 같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덮어두고 봉인한 나만의 불장난들, 나의 다른 분기점들도 종종 꿈에 나타나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