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억울해 할게

뒤늦은 <우리들의 블루스> 감상평

by 혁이아빠
image.png 김혜자 님이 내 원망을 풀어준 곳이 이 장면 언저리였던 것 같다.

기대감 갖고 시작했던 우리들의 블루스, 얼핏 둘러봐도 호불호가 좀 갈리는 분위기다. 나도 시간 들여 계속 따라갈지 말지 고민했으니. 개연성 떨어지게 아름답고 괜찮은 사람들만 모여서 서로가 끊임없이 상관하는 저 공동체 안에서 나는 숨 막히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에피소드를 이어갔지만, 나는 솔직히 여러 번 쉬어야 했다.

어벤저스를 모아놓고 끝말잇기처럼 두 사람씩 얽어가며, 각각의 에피소드에 기승전결의 서사를 불어넣고 나머지는 병풍 세우는 게 확실히 놀라운 측면도 있다. 누가 저렇게 해 내겠나. 하지만 그러다 보니, 분명한 한계도 있어 보였다.

지나친 속도감에 너털웃음이 난 적도 있었고, 과몰입하다가 등장인물들이 뱉어내는 신음들에 (방영주와 현이의 사랑과 임신, 그 아버지들의 악다구니) 귀가 아파 끈 적도 여러 번이었다. 신파도 매회 들어가다 보니 연속되는 매운맛에 미각이 마비되었다. 정주행 하기 어려워 한 걸음 늦게 1주일에 한 개씩 쉬엄쉬엄 따라간 이유였다.

그래도 꾸역꾸역 피날레를 향해 가고 있었다. 위암 말기 어머니와 아들의 마지막 여행. 나는 현재 다니고 있는 여러 병원 중 한 곳에 조금 일찍 도착해 대기하다가, 병원 대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회를 음성없이 화면으로만 미리 봐버렸다.

대사는 안들리지만 대강 알겠더라. 마지막 여행으로 마지막 눈물샘 쥐어짜고 돌아가시겠군. 아들은 그제야 깨닫고 진실한 눈물을 흘리며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이제 시청자로서 흘려줄 눈물도 다 말랐다. 인공눈물을 좀 준비해야 하려나. 그래도 제일 이름값있는 대배우들이니 제일 나중에 등장하는군. 막판이 되니 이렇게 배우들을 줄 세울 수 있는 힘을 작가가 과시하는 듯하여 좀 불편하기도 했다.

극 중 강옥동(김혜자 분)은 자신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가며 이별여행을 떠난다. 남편을 잃고 아들딸 건사하겠다며 남편 친구의 첩이 된 그녀. 아들 눈에는 부귀영화라도 누리고 싶었던 걸로 보였겠지만, 새 남편과 그 본처의 병수발만 하다 그들마저 보내고 다시 쫓겨난 여인. (강옥동 캐릭터의 전사를 이해하는 데도 한참 걸렸다). 그 애증의 새 남편에게 살아생전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찾아간 제사 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죽기 전 고향이라도 찾아가 볼까. 이름이 바뀐 탓에 아무도 기억하질 못한다. 어렵사리 더듬거리며 찾아간 고향은 모습도 잃고 저수지가 되어 있었다. 가는 곳마다 누가 모질게 따라다니며 옥동의 추억을 지워놓은 듯했다. 남편이 사주던 그 맛이 그리워, 먹지도 못하면서 시킨 짜장면을 동석(이병헌 분)이 엎어버렸을 땐 잠깐 쉬었다. 동석의 눈에 비친 억울함과 분노의 파동이 내 가슴에도 일었나 보다.

제주에 살면서도 한 번도 올라보지 못했던 백록담, 이틀이나 걸릴까. 그만한 틈새도 없었던 풍진 삶이라니. 에휴. 결국 다시 짜장면을 먹고 둘이 선 곳은 시장통의 작은 식당 앞. 짜장을 사주곤 했던 동석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이자, 자신이 일했던 곳. 언제부터 일했냐는 아들의 질문에 '열세 살인가' 흐릿한 기억대로 무심하게 답한다.

이제 칠순을 갓 넘긴, 김혜자 님보단 고두심 님에 더 가까운 우리 어멍이 겹쳐 보였다. 더 어렸다. 처음 일을 시작해야 했던 나이가. 별다른 대사 없이 무심한 눈으로 답하는 옥동의 모습이 지나가는 투로 얘기했던 나의 어머니와 닮았다. 그땐 다들 그랬어,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마지막 임종 장면과 어벤저스 모두 모여 함께 즐거워하는 체육회는 보지 않았다. 이미 보기도 했지만, 보지 않아도 되었다.

며칠 기다려보았다. 지금 이 느낌이 순간 스쳐간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같았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더 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어머니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한 덩어리로 뭉쳐 오랜 세월 굳어졌기에, 아무리 씻어내려고 해도 덕지덕지 붙어있던 묵은 감정도 드라마와 함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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