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감정을 배울 시간이 필요하다.
-손원평의 아몬드-
아들이 볼 책을 빌리러 도서관을 갔다가 서가에 꽂혀 있는 손원평의 장편소설 아몬드를 보았다. 유명세가 있던 소설이라 손을 뻗었다. 난 주로 읽을지 말지 판단할 때 맨 앞과 맨 뒤를 보는 습관이 있는데, 말미에 덧붙여진 작가의 말에 책을 들고 나왔다. 자신의 성장 과정에 불행과 트라우마가 없어 작가로서 깜냥이 부족하다 느꼈지만, 이제는 감사한다는 그 말이 궁금했다.
읽기 전에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유력 정치인 손학규씨의 차녀라는 점도, 그녀가 소설은 물론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 중이라는 점도. 그녀의 아버지가 내걸었던 '저녁이 있는 삶' (지금도 그 문구만큼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정치경력의 정점에서 피력했던 그 약속은 국가 단위에서 실현될 기회를 얻진 못했지만, 적어도 가정에서는 잘 실천되었나 보다.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래서 표정과 감정의 매치를 배워야 하는 아이 선윤재. 그리고 너무도 감정이 풍부하고 여린, 그래서 그걸 가리기 위해 강함을 갈망하며 위악적으로 구는 아이 이수. 이 책은 그 양극단의 아이 둘의 성장소설이었다. 구운 아몬드를 꺼내놓고 씹으며 책을 펼친 내가 마냥 부끄러웠다.
뚜렷한 이유 없이 무언가 결핍되거나 과잉된 채로 세상에 던져진 두 아이. 언뜻 보면 이 소설은 양극단의 아이 둘이 중간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어떤 사건을 정점으로 감정을 모르는 아이는 감정을 갖게 되고, 감정이 과하여 강한 척 숨기려 했던 아이는 터프가이 가면을 내려놓고. 성장소설의 공식처럼 무언가는 잃고 무언가를 얻고 그런. 하지만 소설은 1차원의 직선 위에서 중간을 향해 뛰지 않는다. 언제나 2인 3각이었다.
소설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소위 '괴물'이었던 작은 편도체의 소유자 윤재가 잇따른 상실을 경험하면서 감정을 성장시켜가는 것이다. 감정을 모르는 윤재이기에 충격적인 상실의 과정마저도 소처럼 느리고 묵직하며 조금은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연속된 상실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감정을 배워 나가는 윤재가 그저 단단한 아몬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각기 다른 삶의 조건에 있는 주위 인물들이 실낱같이 아슬한 릴레이를 이어가며 윤재의 손을 놓지 않는다.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사랑의 물레를 돌리고 또 희생하며 실을 뽑아 윤재가 성장할 누에고치를 만들고 있었다.
윤재는 결국 사랑도 느낄 줄 알게 되고, 희생을 통해 악의 소굴에 빠져 허우적대는 친구 이수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책을 덮을 때쯤에 작가의 말을 다시 읽으며 그제야 깨닫는다. 상실의 아픔에 몸부림치는 유년기를 거치지 않고,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것을 감사한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사랑의 릴레이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처럼 할머니, 어머니의 모계로 이어지는 사랑(할머니와 어머니의 남편들은 각기 자신의 자식을 보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리고 이성 친구 도라의 사랑.
어머니는 윤재에게 감정을 가르치기 위해 매 순간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칼에 찔려 식물인간이 되고 말지만, 윤재는 기억한다.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배운 대로 윤재도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윤재의 생일이자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진 비극적인 살인사건에 희생되는 할머니. 기골이 장대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졌던, 늙지도 않던 할머니는 희생되면서 끝까지 문을 붙들고 윤재를 지켜낸다. 겉으로 슬픔을 표하지 않는 윤재를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윤재는 할머니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배운 희생을 망나니 친구 이수를 되돌릴 때 재현했다.
윤재에게 이성 간의 사랑 감정을 일깨워준 친구 도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육상선수다. 달리기처럼 할머니와 어머니의 바통을 이어받아 윤재 곁을 맴돈다. 심박 수가 최고에 다다르는 그녀의 200미터 경기를 보며 윤재는 자신의 가슴도 뛰는 것을 발견한다. 불난 가슴은 며칠이 가도 식질 않는다. 그녀 덕에 윤재는 전두엽으로 배워야 했던 감정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윤재의 눈에 보인 세상은 또 얼마나 이상했을까. 자기에게 감정이 없다고 소시오패스라 부르던 이들도 있는 감정을 누르고 없는 감정을 연기한다. 정작 감정을 드러내면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란 말인가.
나도 이상해 보였겠다. 화를 내는 법을 나에게 보고 배운 아이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다시 화를 내는 이상한 아빠였다. 일터에서는 전형적인 이중인격자였다. 위로 올려다 볼 때와 아래를 굽어보는 가면이 같이 달려 있는 야누스였다. 갇혀있던 감정들은 밤이면 겨우 새어나와 홀로 마시는 술잔에나 스밀 수 있었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한 이 표리부동한 세상을 직시하고 솔직해지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얼까. 작가는 절대 너의 손을 놓지 않는다는 책임감 있는 어른들의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나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차근히 다시 배워보자고 다짐해 본다. 윤재처럼.
(2021.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