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체력도 이런 저질이 없다. 어젯밤 조금 즐겁다 싶었는데 여지없이 오늘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출근은커녕 밖에도 못 나가고 종일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원인은 감기였다. 옆구리 통증이 좀 줄어드나 싶더니만. 혹시나 싶어 코로나 간이검사를 해보았더니 명확히 아니란다.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감기는 암 발병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초기 진화가 중요하지. 감기약은 썩 내키질 않아서 비타민C를 많이 먹었다. 처형께서 스위스에서 들고 오신 귀한 비타민 한 통을 땄다. 그러고도 부족한 느낌에 아껴두고 있던 귀한? 것들을 총동원했다. 아끼다 유통기한 지날라.
오후 들어 목이 칼칼하고 코가 간지러운 느낌이 잦아들었는데, 비타민 덕분인지는 분명치 않다. 좀 뜬금없지만, 지금 내 상황이 얼마나 사소하고 작은가를 생각해 보니 콧물 따위로 징징거리기가 머쓱해진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튀르키에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지진에 압도된다. 너무 거대해서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곳에서 흩뿌려지고 있을 눈물만 합쳐도 내가, 우리 사회가 최근 겪은 아픔들을 합쳐도 그것보다 작지 않을까?
삶에서 내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이웃이 이런 재난을 맞닥뜨릴 때, 우리는 어떻게 건너가야 할까? 불행의 소화법이라고 책 이름을 붙인 것이 너무도 부끄러워진다. 다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
하릴없이 구글 지도를 켜서 위성지도로 찾아가 본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의 대통령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류의 재난은 대비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지. 어쩜 이리 한결같을까. 누가 책임 물어볼까 봐 피할 궁리부터 하니. 같이 우선 아파해달라고. 조용히 함께 아파하며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보였을 게야. 그랬다면, 늘 그랬듯이 함께 다시 일어섰겠지. 책임을 묻지도 않았을 거야. 너한테 일으켜달라고 떼쓰는 거 아니거든.
문지혁 작가님의 소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재난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지, 다시 확인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