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몸일기25> 추억팔이

by 혁이아빠

서울에 계속 머물고 있다. 덕분에 전주에 있는 동안 그리웠던 이들을 만나는 호사를 누린다.


곡절을 만나 무릎이 꺾이고 눈물을 삼키는 시간을 견뎌내며 만든 진한 나이테를 가슴에 새긴 사람과 만나는 게 좋다. 그 시간을 견뎌내며 품었던 속내, 그 맛을 아는 이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감추었던 표식을 꺼내어 서로 확인하는 시간. 잘 견뎌내주어 고맙다고 서로 위로한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좋았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자신만의 슬픔에서 빠져나와 삶 앞에서 겸손하게 감사할 수 있었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더 가벼웠고, 더 많이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더블헤더를 안 하지만, 오늘은 저녁 약속도 잡았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낸 직장 동료들과 뭉쳤다. 동료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나는 무서운 상사였기에.


평소엔 직장에서 MZ 세대가 어쩌고저쩌고 흉보던 꼰대였지만, 이렇게 불러줄 땐 두말없이 나가서 밥을 사야 한다. 함께 추억팔이에 흠뻑 담가졌다 일어나 보니 어려웠던 그 시간이 화사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를 실행한 것 같다.


덕분에 늦었다. 밤 열시 반에 결재 올리라며 독촉하던 내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인데, 이제는 이 시간에 잘 준비를 마친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겠지. 그래도 피곤치만은 않네.


(2023.2.2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몸일기 24> 마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