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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일기31> 정성껏 들여다보기

2023.2.26.

by 혁이아빠

엊그제 미세먼지가 창궐하던 날 감기 기운이 있었다. 오쏘몰과 비타민C 집중 투하로 초기 진화에 성공했다. 그러자 구내염과 입술 물집이 같이 올라온다. 아내는 진즉 알아챘지만, 나는 이제서야 알아챈다. 몸이 서울 다녀온 유세를 떠는구나.


작년에도 서울 출장이 길어지면 꼭 몸이 앓는 소리를 냈었다. 오늘은 좀 쉬어볼까. 마침 아내와 혁이는 겨울의 마지막을 즐기러 스키를 타러 가고 집에는 나 홀로.

카페인을 다시 며칠 줄여보기로 다짐한 터.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황정은의 소설을 읽는다. 한 장면을 꼼꼼하게 읽어본다. 천천히 눌러 읽다 보니 작가가 그려놓은 속도 표지판이 보인다. 한 호흡에 단숨에 써 내려간 듯한 문장도. 며칠 걸러 한 글자씩 철필로 새긴 듯한 단어도.

오후엔 영화를 보는 호사를 누렸다. 얼마 전 본 슬램덩크 더 퍼스트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금은 긴 영화를 골랐다. 타르.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은 내 몸은 아무 때고 졸렸는데, 하필 중요한 대목에서 정신을 놓은 것 같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봐야겠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작품을 대하는 예의를 생각해 본다. 좀 적게 보더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겠다. 대학시절 영문학 수업이 떠오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였나. 그 두꺼운 소설 중 단 한 장면에만 집중해 보라고 가르치던 선생님 말씀이 선하다.


내 몸도. 대충 대하지 말고,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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