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의 방학이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와보니 아내가 드디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모양이다. 모두의 마블.
내 세대들에겐 부루마블이었는데. 지구버전이 있었고, 우주 버전이 있었다. 지구 버전은 정말 서구 열강에 대한 사대 의식으로 똘똘 뭉쳐 나라와 도시들을 GDP 순으로 도열시켰었지. 난 늘 가장 비싼 임대료를 자랑하는 뉴욕 빌딩 사재기에 올인하곤 했었다.
소년의 소유욕을 한껏 자극하는 이 게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끝내는 시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한 사람이 파산을 맞이해야 끝나곤 했다. 오늘의 첫 경기도 엄마의 파산을 보고서야 끝이 났다.
그나마 주어진 통화량만으로 게임을 하다 보면 금방 승부가 나곤 했으나, 똘똘한 소년들은 플레이어 중 은행장을 따로 뽑곤 했었다. 그리고 은행을 통해 대출, 어음발행, 통화팽창, 고액권 화폐 발행을 이어가며 파국을 미뤘다. 하루 꼬박 걸려 펼쳐진 승부 끝에 은행까지 모두 사는 것으로 독점의 끝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 지금 금융권 부장쯤 하고 있으니, 어린 시절 사각 게임판의 확장 버전을 실제로 살고 있는 셈이다.
지연된 파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몸도 비슷하다. 어느 유튜브에서 그러더라. 부신은 우리 몸의 보조배터리라고. 그 보조배터리까지 끌어쓰며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오히려 일상이 되다 보니, 몸은 상시 비상상태. 어찌어찌 하루하루 견뎌내지만 부신에서 나오는 코티솔마저 모자라 종일 부어대는 커피에 노출된 몸은 이미 그로기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요 며칠 커피를 안 마시고 있다. 디카페인 커피를 맛만 보는 것으로. 커피 끊기 3차 도전이다. 아침에는 졸음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점심에도 무시로 졸리고 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