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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May 03. 2022

1. 일단 도망쳐

간 쓸개 다 내주다. 간내 담도암 발견부터 수술까지 #1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2021년 1월 말, 나는 전주로 향하고 있었다. 직장에서 1년간 전주로 파견근무를 가라고 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난 쾌재를 불렀다. 자정을 넘겨 돌아와 침대로 기어들어가다 잠든 가족을 깨우기 싫어 거실 안락의자에서 잠드는 나날도 지겨웠고, 업무 강도에 짓눌려 일에 대한 자부심이고 책임감이고 모두 내려놓고 싶은 상황이었기에. 달팽이마저 다른 곳보다 느릴 것 같은 슬로 시티에서 뒷짐 지고 천천히 걸어보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게다가 아내의 고향이기도 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계셨다. 아내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아내가 자라난 풍광 속에서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살에 갓 접어든 아들도 어머니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성장하며 어머니의 너른 심성을 닮아갈 수 있겠지.


가슴은 그렇게 벅차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주에 도착한 이후 무시로 체했다. 누구도 나를 쫓지 않는 곳에서 왜 속이 막히는 것일까. 처음엔 매 끼니 밥을 사 먹은 탓이려니 했다. 아들 유치원 입학 시기에 맞추기 위해 가족 전체 이사는 3월 초로 잡고 한 달간 혼자 지내던 터였다.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면구스럽지만 매 끼니 장모님께 의탁하기로 했다. 그래도 소화불량은 반복되었다.


곧 설이었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아뵈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챙겨주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도무지 얹힌 속이 풀릴 기미가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위내시경을 포함해 건강검진을 받아보았다. 역류성 식도염에 위염도 좀 있단다. 옳거니, 술로 버텨온 시간이 얼만데.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처방전에 적힌 약을 받았다. 온라인 쇼핑에서 위염에 좋다는 양배추즙도 주문했다. 정신만 쉬어가도 행운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몸도 챙길 수 있겠구나 싶어 오히려 감사했다.


하지만 약과 양배추 즙을 성실히 복용하며 일주일을 보내도 속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없었다. 끼니마다 앞에 놓인 음식이 소화가 잘 될지 염려가 되었다. 위에 진입한 음식이 헐거워진 괄약근의 틈새로 빠져나와 식도로 다시 역류하면서 겪는 뜨거운 느낌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 답답한 느낌의 좌표는 거기가 아닌 듯했다. 명치끝, 위장 끝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2월 중순에서 말로 넘어가는 그 주 주말. 서울에 다시 올라와 5살 아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즐거움에 겨운 아들이 내지르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듣기 힘들었다. 조용히 좀 하라고 퉁명스레 외치고는 방에 들어앉았다. 침대에서도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루 안락의자에 쭈그리고 잠을 청하다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인사도 없이 홀로 집을 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전주행 첫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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