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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May 03. 2022

2. 담즙이 거기서 왜 나와?

간 쓸개 다 내주다. 간내담도암 발견부터 수술까지 #2

이상하게도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답답한 것은 분명 소화기인데 숨이 막혔다. 코로나의 대유행 즈음 함께 찾아왔었던 공황장애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잠시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던지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러자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난번 처방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다시 잘 좀 살펴보라고 따지고 싶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지난주 건강검진을 했던 병원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전에 주신 식도염 약을 계속 먹고 있는데, 속이 여전히 영 불편합니다.”

“음…… 그럼 위장약을 추가로 좀 드려 볼게요.”

아니 위장 아니라니까요. 여기에 딱 얹힌 느낌이 계속되는데, 예를 들어 담즙이 잘 안 나온다든가 해서 소화가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왜 거기서 담즙 얘기가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평소 간 수치가 염려되긴 했지만, 간과 담즙, 담즙이 흐르는 담도, 담즙을 일시 저장하는 담낭, 그리고 췌장 등 다른 소화 관련 장기의 기능과 관계에 대해서는 당시 무지했었다. 그저 처방받은 약 먹으며 술도 좀 끊고 식사도 순한 것들 위주로 조절하면 곧 회복될 것이라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떤 다른 존재가 내 입을 빌린 것일까?


돌이켜보니 그 순간 담낭을 떼어내신 어머니가 떠올랐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1년 전 담낭을 떼어내셨다. 정말 별일 아니라며 수술을 다 마치고 퇴원하신 뒤에 통보하듯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쓸개가 떼어도 아무 이상 없는 장기구나, 맹장 같은 존재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명절에 어머니를 실제로 뵙고 난 뒤부터였다. 어머니는 식사를 예전처럼 많이 하시지도 못했고, 연신 트림을 하며 불편해하셨다. 덕분에 식사 후 한참을 걷는 건강한 습관이 생겼다며 애써 웃으셨지만 몸에서 자꾸 하나씩 덜어내시는 어머니가 애잔해 기억에 남았나 보다.


여하튼 나는 이 불편한 느낌의 좌표가 위가 아니라 담즙이 췌장의 소화액과 섞이는 십이지장 어간이라고, 대강의 해부학적 위치를 짚어가며 밑도 끝도 없이 주장하기 시작했다. 어설픈 지식이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는 게 이런 경우이겠지만, 난 당시 얕은 내 지식을 근거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이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고, 난 오랜만에 내 몸의 주관적인 느낌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아마도 지난번 건강검진 혈액검사 시 빌리루빈 수치에는 큰 이상이 없었고 육안으로도 황달 증세는 보이지 않았던 탓일까(참고로 담도암을 발견하게 되는 주된 계기는 황달 증세이다).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정 불안하면 초음파 검진을 해보자 했다. 다행히 초음파 검진은 바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지방간이 문제였다.


“지방간이 심해서 초음파로 관찰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지방간이 있으면 이렇게 전부 허옇게 보입니다. 자세히 보려면 금식하고 내일 CT를 찍어보세요.”


지방간이야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10년 가까이 풀지 못한 오래된 숙제였다. 지방간이 있으면 초음파로 들여다보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에는 이 단계에서 보통 추격을 멈추었었다. 그래, 기승전 지방간이니 살 빼면 되지 하고. 하지만 이미 내 판단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몸의 본능이었다. 냉큼 내일 아침에 바로 찍자고 하고 돌아 나섰다.


그날 밤은 유난히 잠도 오지 않았다. 텅 빈 집에서 외로움 속에 한참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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