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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May 04. 2022

3. Cholangiocarcinoma 콜랑지오카시노마

간 쓸개 다 내주다. 간내담도암 발견부터 수술까지 #3

다음날 2월 23일 아침, 병원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복부 CT는 처음인지라,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조영제 느낌이 생소했다. 이래서 그렇게 서명을 많이도 요구했구나. 30대부터 나름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동안 CT 촬영 한번 할 생각을 못 했을까. 점점 조바심이 났다. 결과를 언제나 알 수 있을까. 내일 오라 하지 않고 조금 기다리란다. 병원이 작아 대기 환자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내 이름을 부른다.

간에 뭐가 있는데 모양이 좀 안 좋네요.


설명은 그뿐이었다. 종합병원을 가 봐야 할 것 같단다. 서울로 전원 하길 원하면 소개해 주겠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드라마에서 참 많이 나오는 고정 멘트인데, 그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르면 물어보기라도 하지. 만일 지인이 이런 상황이라면 입 뒀다 뭐 하냐며 타박했을 텐데. 솔직히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아마 당시의 난 ‘모양이 안 좋다’는 말을 ‘이게 뭔지 잘 모르겠다’로 해석한 것 같다. 검사 결과 영상에는 무엇인가 있는데, 시간을 들여 살펴봐도 자기는 이게 뭔지 잘 모르겠으니 더 큰 병원에 가서 물어보라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알아서 하겠다고만 말하고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오는 길에 얼핏 눈을 마주친 의사 선생님의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알아채기 어려웠다. 애처로운 눈길 한번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심각한 상황이냐고 물어볼 틈이 생겼을 텐데. 왜 애써 표정을 감추었을까. 이 젊은 남자가 걸린 중병에, 어이없이 밀어닥친 중차대한 불행에 나는 관여한 바가 없다고 애써 부담을 털어버리고 싶었던 걸까.


원무과에서 결제를 마치자 진료의뢰서가 손에 쥐어졌다. 차분히 앉아 의뢰서를 들여다봤더라면 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은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상황을 다 알게 된 지금의 생각이다. 당시엔 그렇게 걱정되어 뒤척이다 검사를 받았음에도,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읽어볼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마 진료의뢰서가 무엇인지, 거기에 무슨 말이 쓰여 있을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와중에 나의 최선은 비싸다고 생각한 검사비용 보전을 위해 실손보험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다 챙겨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서류들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휴대폰 앱으로 보험금을 청구했다. 보험사에 송부한 서류를 아내에게도 첨부한 뒤 점심을 먹으려 죽집을 찾아 나섰다.


내 상황을 확인하지 않고 보험금부터 청구하고 한가롭게 점심이나 먹고 있었다니. 지금도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검사를 위해 금식한 뒤라 허기가 앞서서였는지,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서보지 않아서 무지해서였는지, 의뢰서에 쓰여 있는 말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본능에 이끌려 열어볼 엄두가 안 났던 것인지.

사무실에 돌아와 장인어른과 통화했다. 철없는 내가 밥이나 먹는 사이 서류 사진은 아내에게서 장인어른께 가 있었고, 서류 내용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아차리신 장인어른께서는 병원에 급히 연락하고 계셨다. 내게 당장 인근 대학병원 영상의학과로 가보라 하셨다. CT를 촬영한 병원에서 엉겁결에 받아온 영상 CD를 내밀었다. 영상과 수치들을 들여다보는 교수님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제야 위기를 직감했다. 이전 병원의 영상판독 결과와 진료의뢰서를 열어보았다. 얼핏 보니 간에 덩어리(mass)가 보인다는 말이 있고 그 아래부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계어들을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단어 하나하나는 뜻을 알겠는데 조합하니 여전히 뜻이 모호했다. 이게 그리 큰일인가 싶기도 했다. 맨 마지막 줄에 이르기 전까지.


Cholangiocarcinoma.

제일 마지막 줄에 조그맣게 별거 아니라는 듯 쓰여 있던 단어였다. 담도암. 한글로도 좀 써주지. 그게 어려우면 폰트라도 좀 키우거나 볼드 처리라도 해서 시선이 한 번만이라도 더 가게 해주지. 맨 마지막으로 그 단어를 검색했을 땐 배터리가 5% 남아 있었다. 콜랑지오카시노마. 단어 옆 스피커 아이콘을 몇 번이나 눌러 어떻게 발음하는지 듣다가 겨우 아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무서워’


좀 더 정확한 판별을 위해 MRI 검사를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대폰이 꺼졌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 나의 위기를 알릴 길도 없었다. 원통형의 MRI 검사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기계 특유의 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공포가 엄습해 왔다.


아쉽게도 진단은 바뀌지 않았다. 간좌엽 간내 담도가 확장된 형태란다. 간문맥 가지 혈관에 침범이 있어 보이고, 반응성 림프절도 보인다고 쓰여 있었다. 혈액검사에서 얻는 암표지자 CA19-9 수치는 133. 당시엔 몰랐다. 암 병기를 정할 때 혈관 침범과 림프절 침범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CA19-9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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