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일기 48> 행복한 고민이 얹히고 있어

2023.3.15.

by 혁이아빠

읽은 책, 읽다 만 책, 읽어야 할 책들이 얹혀 체하기 일보 직전이다. 이래서야. 다음 책을 한 권 더 쓸 수 있다면 '읽던 책이 얹힌거야'가 되어야지 싶다. 맘만 동하여 잔뜩 사두고는, 한 권 읽고 서평을 써두지도 못한 채 다음 책을 읽고, 그 책을 다 읽지도 못한 채 다음 책 읽기 모임이 도래하는 식이다.

어떤 책부터 읽어나가야 할지,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 지도 고민이다. 고민이라고 굳이 표현하는 것이, 우물쭈물 정하질 못해 이거 찔끔, 저거 찔끔 보이는 대로 읽다가 흐름을 놓치고 있기 때문. 참 골치 아픈 상황이다. 일하는 시간에도 자꾸 책이 염려되고 오늘 돌아가서 무슨 책을 읽어야 하나 고민된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 중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하는지는 참 쉬운데. 빨리 변질되는 것부터, 영양소 균형 대강 철저히 맞춰서, 그마저도 고민되면 아내가 정해주는 대로 하면 되니까.

이 고민을 해결하려고 또 누군가의 서평집을 잔뜩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자, 시작이고 출발이며, 알파요 또 오메가. 따라 읽고 따라 써 보리라. 필사하듯 베껴도 같은 글이 아니다. 어떻게든 내가 꾹꾹 눌러 쓴 글에는 남들과 섞이지 못하는 내 고유성과 단독성이 범죄현장의 지문처럼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건 chat GPT도 따라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고민은 그냥 고민이라고 하니까 좀 아쉬워. 그럼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 두겠다. 밀린 책들이 대부분 그 작가를 기다렸고, 반가웠고, 그래서 읽고 싶어서 산 것이니, 사랑하는 이들이 무척 늘어난 셈이다. 결혼생활이 한 사람과 깊이 파고들어는 것이라면, 저자들과의 사랑은 자꾸 벌리게 된다. 누굴 먼저 만날지, 순서마저도 사랑처럼 우연이면서도 운명이다. 그러고 보니 고민할 필요가 없구먼.

오랜 기다림 끝에 아내를 만났듯, 기다려본다. 어찌 되든 읽고 또 읽다 보면 임자를 만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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