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같은 시작이었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것처럼. 투명인간이 나타났다. 60년생 성석제 작가가 그린 아마도 60년 즈음생 베이비부머 세대 김만수와 그 가족의 비극적 생애, 그 시작은 투명인간이 되어 마포대교 자살방지 문구 근처를 서성이는 김만수가 다른 투명인간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었다.
제목이나 첫 단락만 보면 무슨 환상특급 같지만, 그의 생애를 좇아가며 소설이 그려내는 퐁경은 한국사의 주요 굴곡진 순간들을 꽤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바보같을 정도로 순수하고, 나보다 가족과 회사를 먼저 생각했던 한 인간과 그의 가족이 마치 영화 <박하사탕>처럼 무심하고 무자비한 한국사의 숨가쁜 전개 속에 으스러진다. 아니, 풀어져 흩어진다. 변기 속에 버려진 휴지펄프처럼.
읽고 나서 찾아보니 이 책은 흔히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위로(물론 작가는 명시적으로 소설은 위로를 할 수 없다고, 그저 함께 있어줄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지만)로 읽힌다. 종으로 뻗어 내려오는 가계의 조건과 운명을 지고 횡으로 뻗은 전쟁의 시대, 이념의 시대를 통과한 세대. 다 통과하고 나니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없는 존재 취급당하는 그런 세대. 이름 없이 시대를 지탱하다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진혼곡.
이렇게 놓고 보면 투명인간이란 설정은 환상의 영역으로 뜬금없이 비약한 것도 아니고,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충격요법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동기들에게 붙인 꽤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이름이라 하겠다.
이렇게만 설명하자니 대립축이 분명한 소설을 상상하기 쉽겠다. 선한 개인과 악한 사회, 우리가 잃어버린 가족애에 대한 향수와 그 가족을 짓이기며 해체한 시대 변화의 무자비함이 그 손쉬운 대립항이다.
하지만 그가 던져놓은 투명한 투명인간의 삶은 다분히 논쟁적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 내가 처한 삶의 자리에 따라. 그래서일까. 작가는 소설의 화자를 끊임없이 돌려세운다. <라쇼몽>처럼. 마이크를 잡은 등장인물 각각에게 진실과 진심이 있고, 각자의 입장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납득이. 이런 걸 소설이 성취해낸 핍진성이라 하나. 모든 삶이 그럴싸하게 삶으로서 이해된다. 그 경지에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윤리적 경계선을 긋기란, 투명인간에 선악이 없다고 소설이 밝히고 있듯, 불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세일즈 한다는 마음으로 소설이 제기하는 몇 가지 연습문제를 던져본다. 사실 한 문제를 임의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물론 답안지는 없다. 나도 푸는 중이기도 하고.
1. 투명인간은 초능력인가 장애인가. 어린 시절 투명인간이 되면 무엇을 할까 상상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종횡무진, 초능력이다.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받는, 지독한 장애다. 성장기에는 자신의 존재는 없는 양 희생하며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결혼자금을 대주는 맏이의 존재가 부모에 버금간다. 하지만 내가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그렇게 오지랖 넓게 너와 나 구분 없는 자는 가정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손절해야 할 대상이다.
2. 당신에게 누가 가족인가. 이 소설은 형제자매가 많았던 베이비부머 시대 가족애의 양상을 다룬다. 혈연이란 특별한 희생을 강요했다. 맏이라서, 동생이라서, 남자라서, 여자라서. 누구는 공부하고 누구는 일해야 했다. 연탄가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큰누나와 작은 누나. 고압산소 치료는 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김만수 씨가 상징적으로 웅변하며 우리에게도 묻는다. 누굴 살려야 합니까.
3. 나와 너, 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 경계는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투명인간이란 세포의 경계가 없어 반사나 흡수 없이 빛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존재다. 한없이 가족을 경계 안으로 품다가도, 이른바 선을 넘는 침범과 모욕, 폭력에 노출되기 일쑤다. 헌신은 미련하고, 독립적인 자아로 분화되지 못한 채 나와 가족, 나와 회사 사이의 경계 없이 한 몸인 그가 답답하면서도 편들고 싶다. 그 반대편에 서서 경계를 분명히 하고 썩은 가지를 도려내는 막냇동생 옥희는 아마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계를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배은망덕하고 비정하다고 하겠지.
4. 시대에 순응해야 하는가 저항해야 하는가. 시대는 파도다, 저항하지 말고 타고 넘어라. 아니다. 독재와 민주, 노동과 자본, 남성과 여성, 분명한 갈라섬과 투쟁이 시대정신이다. 선택의 결과는 어떠했나. 노동 현장으로 투신했던 이들 VS 사측입장에서 그들을 회유하는 김만수. 동구권의 붕괴 이후 빨간나라의 꿈이 사라지자 자본의 끝판 카지노로 흡수되어 버린 활동가 VS 지금도 노란봉투법으로 상징되는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으로 끝끝내 고통받는 김만수. 누가 순응했고 누가 저항했는지.
5. 만수는 사라진 것인가 부활한 것인가. 소설은 유류품만 발견된 이상한 투신 현장을 비춘다. 겉옷과 통장만 발견되었는데, 통장 명의는 김만수. 맞다. 어릴 적 염력을 믿으며 우산 하나 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던 덜떨어진 소년. 서강대교에서 투신한 그는 다음 단락 마포대교에서 유령처럼 투명인간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러고는 자신은 한 번도 삶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살기가 죽기보다 쉽다고, 힘주어 말하고 다시 차에 치이는데, 역시 그의 주검은 온데간데없다. 그의 투명인간을 죽음과 실패로 풀어야 할지, 승리와 부활로 풀어야 할지. 아니면 정말 염력으로 풀어야 할지.
6. 염치란 무엇인가. 가족이 해체되고 시대정신이 해체되는 난리통 속에서도 소설을 관통하는 윤리, 염/치. 염치가 뭐냐고 키워준 아버지 만수에게 묻고, 은행빚을 갚지 않고 있는 아버지는 염치가 있냐고 비아냥대던, 아마도 내 또래쯤 되었을 아이 태식. 혈육도 아닌, 그토록 증오하던 길러준 어미에게 신장을 바치고 떠난 그가 남긴 질문이다.
7. 가족을 죽이는 가부장, 가족을 살리는 여성의 존재. 만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경제력을 근거로 방 한 칸 차지하고 앉아 담배도 피우고 탁주도 빚어내라 소리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딸들의 노동에 기생하며, 그 돈으로 노름을 하고, 딸들의 고혈을 좀 더 빨아먹기 위해 결혼도 반대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이 불행한 가족에게 잠깐씩 깃드는 경제적 풍요의 원천은 여성이다. 정다운 기사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존재도, 야물딱지게 운영하는 존재도, 모두 여성이다. 어려운 여건일수록 그게 보편적 풍경이었다. 남자가 대표해 가족 임금을 받고 여성의 가사노동은 셈하지 않던 그 시절에도, 실제 누가 가족을 지탱했는지. 이건 각자의 경험 속에 이미 답이 있겠다.
8. 이야기, 그리고 해원(解冤).
투명인간은 유령으로도 읽힌다. 무슨 한이 있어 유령이 되었나. 못다 이룬, 아니 "이룰 수 없는 희망. 인류는 아직 이야기로부터 젖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 작가도 결국 시대의 밑거름만 제공하고 사라졌지만, 여전히 구천을 떠도는 이 60년 대생 이름 없는 유령들을 위한 해원굿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쓰고도, 소설로는 위로를 할 수 없다고 자조한 까닭과 경지는 무엇일까.
이 문제가 좀 풀리면, 나도 자문해 봐야겠다. 투명인간은 투명인간만 알아볼 수 있다는데, 나는 투명인간인가? 내 눈엔 투명인간이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