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이 밀려온다. 내가 이 소설을 조금만 더 일찌감치 읽었더라면, 암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안 아프고 읽었으면 못 보고 넘어갔을 것이다. 가차없는 시대 속을 살아서 건너온 민초의 비결, 지극히 인간적인 갈지자 행보가 보여주는 놀라운 생명력을.
허삼관 매혈기의 배경은 1960년대 이후 중국의 암흑기다. 저질 철을 양산하면서 가가호호 솥단지와 수저만 결딴낸 토법고로와 집단농장이 불러온 대규모 아사로 상징되는 대약진운동, 뒤이어 이어진 문화대혁명. 시대가 남긴 깊은 골은 굶어죽은 인민의 시체와 불태워진 책이 남긴 검은 재로 메웠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소설은 우리의 기억 속 그 살풍경이 아니다. 재미있다는 것이 반전이다.
매혈기. 말 그대로 생애 내내 피 빨린 이야기다.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아들이 친 사고의 수습을 위해, 농장에 끌려간 아들의 로비를 위해, 아픈 아들의 치료를 위해. 그렇게 삶에서 마주한 굽이굽이마다 죽기 직전까지 피를 뽑히면서도 결국 살아남아 노년을 맞는 것이 줄거리라면 줄거리겠다.
작품은 할 말 많은 그 시절을 다큐로 직격하진 않는다. 다만, 우스꽝스러운 가족의 생애 한 토막을 통해 그 역사 속 광기의 대가가 피였음을 드러낼 뿐이다. 주인공 허삼관과 그 가족들은 어찌 보면 살아남은 중국인의 표준적인 얼굴이겠다. 무수하게 희생되고도 그 시절을 건너 살아남아 온, 피 뽑히기 전 물을 10사발이나 들이켜는 무지몽매와 그걸 버텨내는 오줌보처럼 질긴.
왜 피였을까. 피는 일견 가족이다. 실패한 집단농장으로 기아가 몰아닥치던 시기, 피를 팔아 번 돈으로 국수를 사 먹는 날 남이 뿌린 씨앗에서 태어난 첫째 일락이만은 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락이를 가로막던 장벽이었던 피의 의미는 곧 확장된다. 피는 온기였다. 힘든 시기마다 손을 내밀어 주고 천신만고의 매혈기를 이어가게 해 준 이웃, 심지어 돼지의 온기. 그 온기에 기대어 피 빨린 허삼관은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버텼다.
건강한 신체는 피를 재생산한다. 잔혹한 시절은 옷을 벗겨가고, 가재도구를 앗아가고도 더 내놓으라 요구했지만, 지혜롭게도 민중은 다른 것이 아니라 피를 내놓았다.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골수의 뿌리부터 새로운 피가 재생되며 기어코 살아남았다. 그렇게 허삼관 가족의 일대기는 묵은 피를 교체하며 더 건강해진, 더 부강해진 모습을 뽐내는 지금의 중국을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백미는 희비극이라는 얇은 경계 위에 문학의 성채를 지어올린 것이라 하겠다. 허삼관이라는 캐릭터가 비극의 무대 위에서 한끝 모자란 성품으로 우쭐대며 헤집는 통에 관객은 그저 연민에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늪처럼 끊임없이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는 삶의 구덩이를 피로 메우고 기어 나오는 그의 우직함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그렇게 웃고 울며 허삼관의 일대기를 한 호흡에 따라가게 만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삶은 늘 아슬아슬하다. 허삼관이 생명 같은 피를 팔았듯, 우리도 스트레스 호르몬을 몸에 부어가며 내일의 에너지로 오늘의 위기를 넘긴다. 석 달에 한 번만 피를 뽑듯, 스트레스가 과도한 채로 한 달을 넘기면 몸의 면역기능이 눈을 감고 암이 싹튼단다. 난 이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가진 것은 몸뚱어리 하나뿐인 노동자의 삶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점도 같다.
하지만 작품을 읽고 나면 걱정은 좀 내려놓게 될 것이다. 허삼관이 일갈하듯, 오늘 우리는 걱정 대신 돼지 간 볶음이나 배부르게 먹으며, 눈썹보다 나중 되나 더 길게 뻗는 X털(궁금하면 읽어보자)의 힘을 믿는 것으로 족하다. 기억하자. 우리 몸에서 가장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는 피, 그리고 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