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0 여행과 그림의 닮은 점

여행 중 그린 그림들 그리고

by Thi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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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소진 부탁드립니다.'

요청에 따라 저는 급작스럽게 연차를 신청했습니다.


연차수당보다 휴식시간이 소중했던 저는,

잠시 시간을 내 어머니와 일본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울에서 제주도보다 가깝다는 후쿠오카는

제게 가장 적합한 여행지였습니다.


맛있는 디저트, 초밥

그리고 소소한 여행의 즐거움을 바라고 출발한 여행이었는데

왠지 여행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넉넉하게 스케줄을 짰다고 생각했지만

걸음은 여느 여행객과 마찬가지로
이만 보, 삼만보를 향해가고 있었고


결국, 고된 여행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발에 염증이 생기셨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죄송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아무리 엔저라지만 일본물가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고

모든 것의 사이즈가 자그마한 나라에서

감수해야 할 불편은 꽤나 많았습니다.


돈도 시간도 없을 것을
정확하게 예견했던 것인지
저는 최소한의 그림을 위한 아이패드만 챙겨갔습니다.


유럽을 여행할 때는
항상 그림도구가 한 짐이었는데,

꽤나 대조되는 상황에 멋쩍은 웃음이 나왔습니다.


바쁜 만큼 그림은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아기자기해져 갔습니다.

이웃나라라서 그런지 한국에서 그리던 것들과

주제도 뭐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저는 그림에도 여행에도
실망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지 어언 몇 주가 흘러

날씨는 추워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반짝이는 풍경과 소품들 속에
가을의 소박한 기억들은 잊혀가
내년을 맞을 단단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패드에 담긴 몇 조각의 그림을 다시 마주했을 때
일본의 풍경은 한국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보지 못한 머리스타일의 사람

한국에서 자주보지 못하는 까마귀

오리배의 모양도 사뭇 달랐고
음식 또한 한국음식의 정갈함과는 다르게
좀 더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무엇을 느꼈는지

그때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그 모든 것이 그림들에 담겨있었습니다.


물론 사진도 사진대로 많이 찍었지만

그림은 일본에서의 관찰의 시간,
그리고 여행의 시간이 그림안에는
아주 아주 그대로 담겨있었습니다.


어쩐지 그림 하나하나가 기특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무엇이든 남겨보겠다고 몇 점 그린 그림이

아주 보람찼습니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도 그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이라는 짧은 여행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자기 자신의 시간이 그대로 담겨있는
무언가를 몇 점 세상에 남겨보고 싶은 게 아닐까요?

여유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합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회사원에게 여유란, 또 하나의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운을 내서 작은 그림들을 또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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