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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 쪼개서 바라보기

일상의 조각들

by Thinker


서문

어느 날 문득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한 많은 사람이 그렇듯

저 또한 날카로웠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었습니다.

생계와 집안일, 주변환경은
제가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게끔 놔두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둘러댔지만

가장 전업작가를 선택할 것 같았던 제가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것은

몇몇 친구들에게 꽤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감각이 무뎌지도록

완전히 내버려 둔 건 아닙니다.


7-8년 이상 미술강사로 일했고,

아이부터 성인까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열정적인 수업에 '선생님'이 천직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더러 있었지만,

사실 선생님이란 직업은

제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로는
감당불가능했습니다.


아니면 제가 적당히 제 에너지를 지키면서

가르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왜 이 감각을 돌이키냐고 묻는다면

그건 직장인으로서 저의 번아웃 때문입니다.


번아웃의 정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으로 인해 무기력증,

심한 불안감, 자기혐오 등에 빠지는 것입니다.


번아웃을 이겨내는
많은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택한 방법은 바로, 창작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게 친숙한 '그림 그리기'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오랜 관찰이 요구됩니다.

이 오랜 관찰은 삶을 느리게 보게 만드는데,

평상시에는 너무 빨리 시간이 지나

내 삶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인스턴트적인 시각을 버리게 됩니다.


뭐든 하나하나 곱씹어 바라보며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이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합니다.


현대인들의 일상엔

집안대소사부터 사회적 이슈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생각하기 힘듭니다.


피로사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겠지요.


어느샌가 모든 일을 뭉뚱그려

'피곤해'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고 했지만

그것을 다시 쪼개서 바라보면

생각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어떤 사건, 감정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에

다시 그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복잡하게 느껴지는 대상을 그릴 때에는

여백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주인공인 대상을 그리려 하기보다

차지하는 공간과 차지하지 않는 공간을

구별해 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쪼개고 쪼개서

부분 부분을 관찰해야 합니다.


삶 전체를 쪼개 작게 바라보기,

여백과 면적을 확인하기.

이것이 먼 길을 돌고 돌아 돌아온

저의 창작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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