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세계의 이원성은 눈으로 관찰할 수 있기에 쉽게 판단된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무엇이 이익인지,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지 우리는 늘 저울질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자주 뒤바뀐다. 거짓처럼 들리던 말이 오히려 옳았던 경우, 손해처럼 보였던 일이 더 큰 이익이 되었던 경우, 아름다움이 사실은 껍데기뿐이었던 경우.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다.
삶에서 그런 틈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너머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분리’라 부르는 것은 본질과는 다른 모든 불완전한 것들이다. 끊임없이 변하고, 분열하고, 확장되지만 그 바탕에는 실체가 없다. 흔히 허상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 알 수 없는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모든 것들을 ‘분리’라 부른다. 본질을 직접 말할 수 없기에, 그 반대편을 지워내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첫걸음은 보이는 외부와 보이지 않는 내부, 그리고 내부의 양극단을 직면하는 일이다. 세상을 겉모습 그대로만 해석한다면 인생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이들은 결국 내면으로 뛰어들게 되지만, 이 과정은 언제나 위험하다.
‘분리’의 원리를 역이용해 내면을 향할 때, 작은 자아는 여전히 이원성 위에서만 작동한다. “내가 이러니, 반드시 그 반대도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허무를 직시하면 자아는 축소되지만, 그 틈새로 분노가 스며든다. 생에 대한 분노, 허무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틈을 통해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힘이 들어온다. 잠식당하면 내면은 위태로워진다. 붕괴를 피하려는 본능이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작은 자아를 지키는 힘은 때로 악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균열은 언제나 양면을 가진다. 위험을 품으면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원성 속에서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 존재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본질은 아니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자각하는 순간, 역전이 시작된다.
좋음이든 나쁨이든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한다면 본질은 아니다. 자각하는 순간 놓아줄 수 있다. 말은 단순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그러나 악조차 불완전한 분리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내면은 빛의 영역에 다가선다.
육체가 있는 한 이 과정은 평생 이어진다. 이원성을 깨달을 때 허무가 엄습하지만, 육체는 세상 속에서 늘 역할을 부여받는다. 역할은 홀로 수행될 수 없으며,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끝없는 반면의 기회가 주어진다. 때로는 특별한 힘이 주어진 듯 보이지만, 그것 또한 분리의 방식에 불과하다. 결국 불완전한 원리에 흔들리며 유지되는 형상일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매달려 세상을 고정된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모든 판단은 상대적이다. 한 자아에 집착할수록 내면의 길은 흐려진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깨달음은 허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에 들어서면 삶은 오히려 활력으로 가득하다. 불완전한 이원성을 넘어선 것에 닿기 때문이다. 남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그곳에 선 이는 분명히 안다.
때로 한 육체 안에 선과 악처럼 보이는 것들이 번갈아 드러난다. 그때 작은 자아는 특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는 순간, 곧 함정에 빠진다. 작은 자아의 특별함에 잠식되면 내면의 빛은 가려진다.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일상의 감각이다. 우리는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균형은 언제나 기울고 흔들린다. 빛과 어둠, 옳음과 그름, 기쁨과 고통은 서로를 몰아내면서도 공존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 극단을 견디고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허무하다. 그래서 우리는 역할을 다하면서도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
보이는 세계의 이원성은 어디까지나 분리의 한 형태일 뿐이다. 형상이 아무리 늘어나도 본질은 건드릴 수 없다.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그러니 전환은 일어난다. 잘못을 지워버리려 하기보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할 이유조차 사라지는 순간. 그것이 내가 경험한 가장 작은 ‘용서’였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나를 묶던 환상을 풀어내는 열쇠였다.
그 순간 작은 자아는 침묵했다. 두려움과 방어 대신, 조용히 빛이 드러났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이었다. 어둠이 걷히자 빛이 드러난 것처럼, 존재는 본래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그 경험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 다만 크고 작을 뿐이다. 참된 기적은 두려움 대신 사랑을 택하는 단순한 지각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혹은 두려움을 직시하고 허상을 자각할 때, 사랑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 어떤 것. 작은 자아를 넘어선 존재가 드러나는 그 순간, 불완전한 균형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길이 된다.
돌이켜보면, 이 길에는 정신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내가 꼭 ‘나’일 필요는 없었다. 선한 나든, 악한 나든, 모든 모습은 스쳐 가는 현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것을 내면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이겨내는 방식은 외부의 행위와 관계가 없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일 수 있지만, 내면에서 두려움을 직시하고 놓아주는 순간, 빛은 조용히 길을 비춘다.
내적인 여정은 단순히 말로 외친다고 채워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실천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과정은 다를 수 있으며, 경험의 나눔 또한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방이 아니다. 각자의 나눔 속에서 자기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내면의 빛으로 향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