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온유의 태도로 함께하는 길

온유(Meekness)

by BEAU WOI

가장 가까운 사람은 언제나 내 길을 가장 크게 흔들었다. 그럴 수 있다. 그 길은 내게만 보이는 길이었고, 내면을 공유하지 못한 이상 이해받을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 말할 수도 있다. 세상을 살아온 시간은 때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걷는 이 길은 세월의 길이가 아니라, 태어나고 살아내고 죽는 일과는 다른 결의 길이다.


형제와 친구들은 알 수 없는 길을 쥐고 놓지 않는 나에게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의도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보이는 길’을 향해 나아가며 얻고자 했던 것들은 언제나 타인의 차지가 되었다. 나는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고, 그 역할을 잘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은 늘 내게 향했다. 그 역할을 원하는 것 같아 물러섰는데도 말이다. 내가 진심으로 ‘보이는 길’을 가려 했다면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길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흥미로웠다. 타인의 무의식적인 반응과 시선, 그 낯선 기류들이 특히 그랬다. 아마 나의 흥미로움이 그들에게는 이질감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흥미로웠던 점이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이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길이 정말 위험한 길이었다면, 연민으로 나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경쟁과 비교의 태도를 드러냈다. 그 공통된 반응 속에서 나는 오히려 확신했다. 이 길에는 분명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다.


연인과의 사랑도 내가 아는 사랑과는 달랐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길을 붙들어 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내면의 거리였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리곤 했다. 이런 내면을 함께 볼 수 있는 상대가 있을까, 거의 포기했던 시절도 있었다.


먼저, 물리적 거리는 완전한 자유를 주지 못했다. 몸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묶여 있다면 타인의 말과 행동은 반복되었고, 나는 그 반복에 반응했다. 반응의 반복조차 또 하나의 패턴이었다. 떠남이 자유일 줄 알았으나, 때로는 또 다른 억압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그 너머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 그것은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이원성의 세계를 넘어서는 감각이었다.


어쩌면 상대가 내 길을 방해한다고 느낀 적조차도 내 마음이 만들어낸 해석이었을지 모른다. 의도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조차 매 순간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판단 자체를 진심으로, 완전히 놓아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단지 ‘거기 있음’으로 남는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 길을 간다. 그러나 보다 진리에 가까운 눈으로 본다면, 그것조차도 분리된 형상 속에서 본 ‘존재처럼 보이는 대상’일 뿐이다. 진정한 존재는 분리가 불가능한 하나됨 속에서만 잠시 드러난다.


들꽃은 내 길을 막기 위해 자라지도 않고, 나를 환영하기 위해 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내가 그것을 잡초라 부르는 순간, 그것은 제거해야 할 방해물이 된다. 꽃이라 부르는 순간, 그것은 자연의 선물이 된다. 그러나 그 둘 모두 내 해석일 뿐이다. 꽃은 그저 피어 있을 뿐이다. 가까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타인은 철저히 타인으로 분리할 수 있지만, 가까운 이들에게는 ‘그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더 있다. 나는 그 고정관념을 이미 무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판단이 의식의 표면으로 드러난 지금, 나는 그것이 내게 주어진 중요한 질문임을 안다.


온유(meekness)는 그런 순간에 필요한 태도의 근본이다. 그것은 굴복이나 무기력한 인내가 아니라, 힘을 힘으로 맞서지 않고 다스리는 내적 자유다. 온유한 사람은 세상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 온유로 무엇을 얻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순종이다. 그러나 그 순종은 분리나 힘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 너머의 존재에 대한 의존이다. 이 태도로 인해 잃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작은 자아를 바쳐 상징되는 내면의 의도, 그것이 온유다. 산에 자라는 들꽃을 바라보듯,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자유가 열린다. 자유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열린다.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내면의 인정이다. 억지로 밀어내지도, 붙잡지도 않는 것. 판단을 내려놓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


가장 가까운 이들은 그래서 여전히 나의 교사로 남는다. 그 교사는 무엇을 알고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교사인 줄도 모른 채, 그저 자기 길을 간다. 나는 그 무의식적인 태도 속에서 배운다. 그들을 방해자로 보는 대신 교사로 보는 일은 의지를 동원해 해석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온유의 태도를 통해 자연스럽게 열린다. 힘으로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판단을 내려놓을 때, 해석은 역전된다. 그리고 분리가 스스로 그 해석을 구현하듯, 방해가 가르침으로, 억압이 자유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기적’이라 부르고 싶은 일이 조용히 일어난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내 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나는 그것을 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그 앞에는 늘 선택의 찰나가 있다. 진정으로 온유의 내면적 태도를 선택할 때, 내면의 길은 오히려 더 깊게 열린다. 놀랍게도 그 순간, 부수적으로 물리적 길 또한 열린다. 그 부수적인 성취는 잠시 전부처럼 보이지만, 내면이 또 한 번 열리고 나면 어느새 관심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것은 작은 자아 수준으로 만들어진 흥미로운 자기 보호일 뿐이다. 진짜 길은 언제나 내면에 있다. 그리고 그 내면에서 열린 길만이, 타인과 페르소나 없이 진정으로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처음에는 가까운 관계를 넘어 모든 타인이 예외 없이 방해자로 보이는 시기가 있다. 그러나 내면의 판단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완전히 뒤집힌다. 타인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오롯한 나의 길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 길은 누구의 지분도 없는 길, 내 안의 힘으로만 걸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어떤 ‘존재’가 느껴진다. 그것은 작은 자아가 아니면서도, 전체 자아라 부르기엔 아예 다른 결의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대상을 멀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이 길이 평탄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필요한 경험의 지점에서 비협조가 일어난다. 그러나 분리는 그저 분리일 뿐이다. 그 비협조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때, 역설처럼 또 다른 길이 열린다. 나는 그 길을 욕망 없이 걸으면 된다. 그 길은 고독의 길이지만, 동시에 수행의 길이다. 작은 자아에게조차 결국 그것은 하나의 선물이 된다. 분리를 넘어선 자유의 상태가 나를 흔들림 없이 이끈다. 마치 이미 결론지어진 시나리오처럼.


나는 안다. 이 글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준비된 자들은 이미 각자의 경험으로 다져져 있기에, 글 정도로도 이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들은 함께 걷고 있다. 내 길에 네가 따라오고, 네 길에 내가 따라가는 형태가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다양한 역할로 살아가면서도 내면에서 준비된 마음들이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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