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성년 시절,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이였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면 어딘가에 또래와 다른 결이 있었고, 그 다른 결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과 순간적으로 흘러나오는 말투로 드러나곤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 삶의 흐름을 크게 거스르지는 않았다. 공부도 일상도 특별히 힘들지 않았고, 주어진 만큼 해냈다. 앞서 가려는 마음이나 불타는 욕망도 드러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으나, 본질은 달랐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대신 사람들을 관찰하며 묘한 호기심을 품었다. ‘왜 저럴까?’, ‘왜 이런 말을 하지?’라는 질문들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보이는 것 너머를 탐구하려는 시선이었다.
조숙함이 자리잡자 나는 사람에게 묻기보다 책에서 답을 찾는 습관을 들였다. 질문은 끊임없이 솟아났지만 대화로 풀리지 않았다. 결국 책장을 넘기며 답을 구했고, 책은 나의 가장 믿을 만한 길잡이가 되었다. 그 속에서 일찍 깨달았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재와 수많은 시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감정에 이끌려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어린 마음을 서늘하게 했지만, 동시에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의문이 남았다.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데, 책도 거짓을 품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책 속 문장이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에서 진짜를 찾아야 하는가. 어렴풋이 나는 어딘가에 기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찾는 일이 내게 오래 이어질 질문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외형상 무리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밤이면 대부분의 마음이 질문으로 채워졌다. 부모님은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맞벌이로 가정을 지탱했다. 나는 생존이나 소유, 출세 같은 욕망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에서 솟구치는 질문들에만 몰두했다. 그것이 내 삶의 중심이었다.
나와 동생은 같은 환경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내면이 각자에게 고유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같은 조건이라도 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단순한 진실은 더 깊은 의문을 낳았다. 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것은 모호한 침묵뿐이었고, 침묵 속에서 나는 차츰 허무주의에 닿았다. 아무리 붙잡아도 풀리지 않는 물음 앞에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공허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만약 세계가 공허하다면 결론은 단순하다. 이렇게 살다 늙어 육체가 죽으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걸까. 그런데도 윤리와 도덕은 존재한다. 사회적 규약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만든 이들조차 종종 이단아로 불렸다. 그들은 규율을 말하면서도 규율 밖을 살았고, 질서를 설파하면서도 혼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질문을 나눌 수 없는 상황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면 미안해졌다. 그들은 묵묵히 책임을 다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열정을 품지 못했고, 남은 것은 최소한의 다짐뿐이었다. 내 몸 하나는 스스로 간수하여 적어도 가족에게 폐는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 — 허무의 가장자리에서 붙잡은 작은 약속이었다.
나는 가족과 같은 방향으로 열정을 불태우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른 확신이 자리했다. 삶의 방식은 달라도, 정신적 위험 앞에서는 그들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책임이자, 가족에게 주는 조용한 충성이었다.
어린 나는 때로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고 울부짖으며 다른 선택을 하지 말라 말하곤 했다. 이제는 안다. 그것 또한 그들만의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몇 번 조심스럽게 말해주고는 더 이상 붙잡지 않는다. 결국 각자가 스스로 걸어가야 할 길이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몇몇은 내가 말한 쪽을 선택하기도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성격은 늘 일정하지 않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몰아치면 누구에게나 어둠이 깃든다.
오래전부터 나는 내면의 다른 길을 걸어왔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크게 잃을 일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할 때마다 방해나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이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어린 나는 모든 것을 허무로 받아들였고, 육체까지 아무렇게나 다루곤 했다. 어차피 사라질 존재라는 생각이 나를 무책임한 자유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이원성 속에서, 육체로 허무를 오래 직시하면 자의로 작은 자아를 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우연히 흩어지는 미약한 자아와 다르다 — 선택의 결과로서 버리는 것이다. 보통 자아는 육체와 동일시되지만, 육체 안에서 자아가 사라지는 순간 상황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바뀐다. 그 빈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은 대개 작은 자아를 지키라는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그것이 정당해 보이지만, 영적 통찰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 육체에서 자아를 떼어낼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나는 하나의 육체 안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러 얼굴이 오가며 자리를 바꾸는 듯했지만, 그것들을 모두 인정하면 정신분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그 자아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저 흘러왔다가 흘러가는 몇몇 얼굴일 뿐이었다.
가끔 하나의 자아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내면에 알 수 없는 제동이 걸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끝내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나를 돌이켜 경계 너머로 가지 않게 했다. 육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막아낸 어떤 힘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겉으로는 적당히 평범해 보였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