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지혜의 요가’라고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 탐구를 통해 참된 자아, 곧 아트만(Ātman)을 깨닫고, 그 아트만이 브라만(Brahman)임을 체험하는 길이다.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요가 수행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요기라 하기에는 모자란다. 요가와 연결해 보자면, 그저 최소한의 건강을 위해 매일 빠짐없이 *수리야 나마스카라(Sūrya Namaskāra)*를 이어온 정도다. 그래서 전통적인 설명인 “참된 자아를 깨닫고, 그것이 브라만임을 체험한다”라는 말은, 내가 걸어온 ‘다른 길’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아트만이냐 브라만이냐의 구분이 아니었다. 다만 분명히 경험한 것은, 내가 ‘나’라고 믿어온 작은 자아가 진짜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언제나 전체적인, 더 큰 자아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즈냐나 요가는 전통적으로 네 단계로 설명된다. 비베카(Viveka, 분별), 바이라기야(Vairāgya, 무집착), 샷삼팟(Śat-Sampat, 여섯 가지 자질의 훈련), 그리고 목샤 이치차(Mumukṣutva, 해탈에 대한 열망). 그러나 이 단계들은 교과서처럼 일렬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니었다. 내 삶 속에서는 우연처럼 겹쳐 드러나곤 했다.
분별은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결국 ‘여기’에서는 그 답을 온전히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자연스레 무집착으로 이어졌다. 집착하지 않는 태도는 억지가 아니라, 더 이상 붙잡을 이유가 없다는 단순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무집착은 다시 여섯 가지 자질로 흘러갔다. 평정(사마), 절제(다마), 내려놓음(우파라티), 인내(티틱샤), 신뢰(슈라다), 집중의 의지(사마다나). 이들은 억지로 닦은 덕목이 아니라, 무집착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열매였다.
마지막으로 목샤 이치차, 해탈에 대한 열망이 있다. 전통적으로는 진리에 도달하려는 불타는 열망이라 설명되지만, 나는 여기에 집착의 함정이 있다고 느낀다. ‘깨달아야 한다’는 욕망은 또 다른 속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목샤 이치차란 불타는 집착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는 조용한 확신이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열망, 늦든 빠르든 결국 열릴 것이라는 믿음에 가까웠다.
돌아보면 나는 의도적으로 요기의 길을 걸은 적이 없다. 다만 삶 속에서 우연히 접한 고전과 공부가 이 길의 구조를 설명해 주었고, 내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해 주었을 뿐이다.
이 책의 글들은 그 우연한 균열에서 흘러나온 기록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미 즈냐나 요가의 길을 닮아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