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国宝, 2025, 이상일 감독)
예술은 결국 기술의 완성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에 닿는 일이며, 사실 그 길은 예술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실 각자의 방식으로 그 흐름 속을 걸을 수 있다.
영화《국보(国宝, 2025)》에서 키쿠오(요시자와 료)가 본 것은 기술의 정점이나 기교의 절대성이 아니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전 존재로 감지되는 어떤 빛, 분명히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감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사람이 호기심과 여유로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다 가지게 된 듯할 때 진정 시작하게 되는 것이 예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만기쿠(다나카 민)의 무대 위에서 폭발하던 그것은 칸트가 말한 숭고(the Sublime)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언어로 붙잡을 수 없고,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할 수도 없고, 감각이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의 압도적 체험. 그 순간, 내가 알던 세계는 조용히 부서지고 작은 자아는 잠시 사라진다. 빛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것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어린 키쿠오가 무의식적으로 잡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 빛과 존재감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키쿠오는 이미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나약함, 존재라고 믿었던 육체의 한계, 붙잡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절대적 직면. 죽음의 경험은 끝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향한 시작이기도 하다. 그 진실을 잠시라도 통과한 사람은 판단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육체의 허약함, 역할의 공허함, 자아의 무력을 안다. 삶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는 그 순간, 인간은 처음으로, 진정으로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바로 그 질문에서 빛을 향한 길이 시작된다. 그 길은 처음엔 어둠이며, 오랜 시간 혼란과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동력은 두려움이 아니라 열망, 욕망이 아니라 진실이다. 잠깐 스친 단 하나의 순간으로도 인생 전체를 걸 만큼 압도적인 평온의 빛과 존재.
예술은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거칠게 말하면 예술혼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존재로부터 공명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근원적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 열망을 일으킬 만한 내적 경험이 없으면 그 동력 자체가 생기기는 어렵다.
예술은 작품뿐만 아니라 몸짓이나 사람들 자체로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한 인간이 살아온 전부가 어느 순간 표면으로 흘러나오는 현현(顯現)의 사건이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진다. 이해되기 이전에 감지되고, 형태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그래서 예술은 만들려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애를 바친다고 해서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존재를 향한 어떤 목적성, 즉 진실에 닿으려는 절대적 방향이 있을 때 비로소 어느 순간, 어느 대상에게 사건처럼 발생한다.
그래서 타고난 재능은 이번 생에서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았음을 보증하는 증표가 아니다. 재능은 단지 선택의 가능성, 즉 어떤 역할에의 선택이 주어졌다는 정도일 뿐이다. 압도적인 재능이 이미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작은 자아의 행복이나 존재적 빛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키쿠오처럼 가진 것이 적은 상태에서 타고난 재능까지 함께 있다면 삶은 오히려 더 험난해진다. 얻기 위해 발버둥치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 비대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결핍과 재능이 만날 때 과한 욕망이 작은 자아를 덮는다. 무언가를 달성해갈수록 욕망은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고, 재능은 빛을 향한 몸부림이 아니라 작은 자아를 부풀리는 도구가 된다. 예술적 재능을 지녔을지라도 그 순간 예술은 죽는다. 키쿠오에게 잠시 머물렀던 압도적인 도약의 힘도 사라진다. 빛을 향한 길이 작은 자아의 욕망을 위한 길로 바뀌는 순간 예술혼은 꺼져버린다. 존재감의 방향성 또한 흐려져 더는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조차 잊게 된다. 그냥 달리게 되는 것이다. 생명력을 잃으면서.
키쿠오가 한때 무너진 이유는 겉으로 보기엔 기반이 없어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목적이 변질되었기 때문이었다. 기반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문제가 아니었다. 순수하게 빛을 향해 달리던 그의 걸음이 어느 순간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발걸음으로 바뀌었을 때, 예술혼은 소멸했다. 그를 감싸고 있던, 그가 발산하던 힘이 사라진 것이다. 그 힘이 그를 올려놓지 않았다면, 사생아는 타자가 아니라,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가 가지던 것을 잃었다기보다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잠깐의 착각, 잠깐의 맛보기였을 뿐이다. 그러나 빛을 본 사람은 끝까지 추락하지는 않는다. 기억하고 있다면. 욕망과 보이지 않는 빛 사이에서 엄청난 방황을 겪을지라도 말이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존재는 멈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becoming)이다. 육체가 존재인 것이 아니라,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지속적인 방향성이다. 모든 것을 잃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을지라도 빛을 잊지 않는다면 파멸은 끝이 아니다. 정도가 바뀌는 순간이며, 다음 움직임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이 된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의 병과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사고는 각각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키쿠오에게는 방향을 되돌리는 사건이 되었다. 세상은 인간의 판단과는 다르게 움직여서 당연히 인간의 판단만으로 그 기회를 잡을 수도 없다. 그저 수순일 뿐이다. 키쿠오와 반대로, 슌스케는 가문과 기반이라는 시스템 위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예술은 역할이었고, 책임이었고, 수행해야 하는 의무였다. 그는 기술을 성실히 수행했지만 존재의 심연과 마주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키쿠오처럼 불타오르지도, 급격히 성장할 필요도 없었다. 나름의 최선과, 존재적 불꽃은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진정으로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슌스케는 패배자인가? 그저 그림자처럼 2인자에 머무르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인정할 줄 아는, 오히려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키쿠오의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 돌아왔고, 아들의 선택을 막지 않았고, 돌아온 뒤에도 키쿠오를 다시 데려오려 했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인생 전체를 걸고 단 한 번의 현현에 도전했다는 점. 가문으로 돌아와서도 실력은 크게 늘지 않았던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다시 존재의 문턱을 직면해보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마지막 온나가타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발화였고,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예술혼에 닿았다. 키쿠오의 연기를 보고 업계를 떠난 선택은 도망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는 품위였다. 진짜를 보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용기. 아마 그래서 그의 삶이 방황했어도 큰 노력 없이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지만, 존재의 관점에서는 다르다. 슌스케가 마지막 무대에서 온나가타를, 키쿠오가 그 옆에서 다치야쿠를 맡았던 장면은 둘의 관계를 말해주는 결정적 순간이다. 둘은 결국 대립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완성했다. 존재를 향해 달릴 줄만 알았던 키쿠오가 그 존재감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슌스케는 기회와 상황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용기의 대가로 슌스케는 평생 알지 못했던 빛과 예술혼에 닿았고, 단 한 번, 완벽히 그것을 구현해냈다.
바르트는 말했다. 작가가 죽을 때 비로소 작품은 산다. 퍼포머에게도 마찬가지다. 육체를 작품화한다면, 그 역시 자아의 퇴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작은 자아의 퇴장이다. 키쿠오가 존재라는 목적을 잃고 작은 자아를 지키기 위해 기술을 반복할 때, 예술의 힘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는 본래의 자리, 가지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에 닿았던 기억만큼은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 작은 자아를.
키쿠오가 진정 국보의 칭호를 얻게 된 이유는 탁월한 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이지 않는 빛의 안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작은 자아의 명예를 얻기 위한 국보였다면 그 역할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빛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존재가 되었고,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았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그 칭호는 진실이 되었다. 애초부터 그의 선천적 재능의 목적은 바로 그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작은 자아의 욕망이 잠시 그의 인생을 흔들었을지라도.
예술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흐르는 것이다. 존재를 담는 그릇이 이 세상 어디에도 완전하지 않기에 예술은 머물지 못하고 흐를 수밖에 없다. 빛도 마찬가지다. 빛은 머무르지 않고 건너간다. 예술은 기술의 성취가 아니라 존재의 사건이며, 혼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특정 지점에 도달하면 건네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고, 그렇게 확장된다. 오래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길은 사실 예술가만의 길이 아니다. 무대 위가 아니어도, 조명 아래가 아니어도, 이름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 빛은 조용히 흐른다. 상실과 붕괴를 통과하고, 작은 자아의 욕망과 싸우고, 조용히 존재를 비추는 사람들. 삶의 깊이를 통과한 사람들에게서도 어떤 이유 없이 발현하는 순간의 빛이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일 수 있고, 대단한 기술을 갖춘 것도 아니지만, 말 한마디에, 한 번의 눈빛에, 어떤 순간의 침묵에 빛을 스치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존재 전체로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빛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만 알고, 남들이 뭐라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아는 사람들. 이 빛은 반드시 정점에 선 예술가에게만 허락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예술가들을 넘어, 평범하게 빛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 자체로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빛은 육체의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것이고, 육체는 그 반사이익을 받을 뿐이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빛의 흐름 속을 걸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내면은 완전히 공평하다. 내면이 공평하다는 말은, 결국 누구도 그 길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늦든 빠르든, 인간은 반드시 존재의 빛을 향해 걷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