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사는 수행자의 기도
수행자라는 말에는 종종 과장이 따라붙는다. 특별해야 할 것 같고, 일상과 분리되어야 할 것 같으며, 어떤 경지나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오래 바라보고 살아내다 보면, 그 말은 점점 가벼워진다.
수행자는 본질적으로 존재적 진리를 탐구한다. 다만 그 탐구는 설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질문은 계속되지만 그 질문은 소란스럽지 않다. 답을 당장 쥐고 있어야 한다는 조급함도 없다. 진리는 도달해야 할 목표라기보다, 살아가며 계속 마주치는 방향에 가깝다.
그리고 수행자의 중요한 특징은 그 탐구가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상을 더 단순하게 만든다. 수행자는 항상 평화로운 사람이 아니다. 고통도 느끼고, 감정도 흔들리고, 욕망도 일어난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정체성으로 삼지 않는다.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감정을 주인으로 세우지 않으며, 욕망을 삶의 방향타로 넘기지 않는다.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되, 그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필요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쉬며, 외로우면 그 외로움을 인정한다. 기쁨이 오면 붙잡지 않고 흘려보낸다. 물론 슬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금욕도 없고 방종도 없다. 상황에 맞게, 과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필요를 채워주는 태도. 타인이든 자신이든, 어차피 그 둘 사이에 판단적인 구분은 없을 테니. 물론 이것은 물질적으로만 채워준다는 뜻은 아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의미에서 특별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묘하게 특별할 수는 있겠지만, 삶의 결은 오히려 평범해진다. 말은 줄어들고, 설명하려는 욕구는 사라지며, 판단은 느슨해진다. 삶은 더 가벼워지고 하루는 조용해진다.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더 얻는 과정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인 부분이라 어렵게 느껴질 뿐이다. 물질적인 것들을 내려놓는 것도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증명이거나 필수는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디에 있든 크게 상관없다. 산속에 있으면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직업이 달라질 이유도 없고, 특별한 옷차림이나 말투를 가질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존재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 물론 그것은 작은 자아의 자리는 아니다. 평화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수행자는 삶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삶과 싸우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과 함께하며, 그저 삶과 함께 걷는다. 질문은 계속되지만, 그 질문은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수행은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 일상의 숨결이 된다. 여유와 평화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상태로 남는다.
사람들은 보통 여유를 외부 조건과 연결해서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있으면, 환경이 갖춰지면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상태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게라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그리고 그 여유는 오히려 크고 완벽한 조건 속에서는 더 얻기 어렵다. 하루 24시간을 전부 비워도, 오히려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 대부분은 허무만 남는다.
내가 발견한 여유는 아주 단순한 조건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커피와 생화와 책과 빛, 그리고 30분. 많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조합이다. 완벽하게 잘 내려진 커피도 좋지만 필수 조건은 아니다. 손에 들고 향이 퍼지는 따뜻함, 그 순간이면 충분하다. 꽃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게 구성된 꽃도 좋지만, 꽃집에서 산 한 송이여도 되고, 산을 오르다 우연히 마주친 작은 들꽃이어도 된다. 굳이 꺾을 필요도 없다. 평화로운 생명력이 느껴지는 어떤 징표면 충분하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많다면 책을 사도 좋고, 책은 언제나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있다. 새 책일 필요도,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빛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면 족하다. 태양은 낮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까.
하루 24시간 중 이 30분은 마치 기도와 닮아 있다. 그러나 이 기도는 특정한 신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란 결국 마음이 존재적으로 돌아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는 있다. 하지만 그 존재는 바깥에 고정된 대상이기보다, 내가 내면으로 들어갈 때 자연스럽게 안다. 나의 이 30분은 수년간 반복되었고, 반복할수록 더 깊어졌다. 시간은 늘 같았지만 밀도는 달라졌다. 작은 시간인데도 지금은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어쨌든 육체를 통해 감각하므로, 운동을 통한 보존은 필요하다. 집을 나서기 전에는 수리야 나마스카라를 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호흡과 움직임을 연결한다. 이것 역시 거창한 수행이 아니라 몸을 깨우는 최소한의 의식이다. 이 모든 것은 형태일 뿐이다. 본질은 언제나 마음을 바라보는 데 있다. 형태는 통로이고, 목적지는 늘 같다. 하루 정도 빠진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시간을 가진다고 해서 외형적인 삶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 세계에서는 많이 흔들렸다. 멍청한 선택도 했고, 후회할 행동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실패라기보다 반동이었고 흐름이었다. 삶은 원래 그렇다. 수행은 사람을 즉시 단정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안에서 단단해질수록 밖에서는 흔들리는 시기가 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흔들림조차도 바라볼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삶이 흔들리더라도 내 마음의 평화와 작은 행복을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는 것, 그게 아주 작은 차이의 시작이다.
모든 경험을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관조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 해봤으니 별거 없다는 식의 태도가 아니다. 안 해본 것도 생길 뿐더러, 그 순간에도 평화 안에서 삶의 파도를 타는 것이다. 경험은 어떻게 보면 재료일 뿐이고, 그 재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관건이다. 늘 마음을 지켜보고 있을 때만 반응과 반응 사이에 아주 미세한 틈이 생긴다. 길의 핵심. 그래서 관조는 허무와 다르다. 처음에는 세상을 관조한다는 것이 허무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깊어질수록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허무는 의미를 부정하지만, 관조는 의미를 붙잡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다. 바라보되 소유하지 않는 태도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조용한 환경을 찾아다녔다. 세계의 섬들을 찾아다녔고, 혼자 있으려고 애썼다. 바다와 물은 언제나 평화를 찾게 해주었기에, 최대한 경제적으로 혼자 머무를 수 있는 방법들을 찾기도 했다.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공간,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정돈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뿐이라는 것. 많이 흔들리던 바람 같은 시절도 있었다. 다만 삶 전체로 보면 일시적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돌아보는 능력이었다.
돌이켜보면, 가장 빠르게 수행이 깊어진 곳은 의외로 직장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온 직장생활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곳이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잘 버린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그렇게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감정에 반동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흘러가게 만들어버리자, 그 감정은 내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결국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도와 수행은 꼭 조용한 환경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빡빡하고 정신없는 환경에서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어렵지만 단순하다. 단순한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단번에도 이룰 수 있다.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어디서든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태, 내 몸이 다른 공간이 된 상태. 그러나 동시에 몸은 먹여 살려야 한다. 육체가 있어야 감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수행과 현실은 대립하지 않는다. 이 둘을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는 방식, 그것이 속세를 사는 수행자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사치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사치다. 비교할 수 없는 평온과 존재적 압도감. 작은 시간이지만 누구도 모르는, 티 나지 않는 아름다운 시간.
그래서 나는 특별해지지 않아도 괜찮고 증명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으며 어디에 있든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잃지 못한다. 그리고 이 사치는 누군가에게 설명될 필요도, 이해받을 이유도 없이 오늘도 조용히 반복된다. 커피 한 잔과 빛 한 줄기와 언제든 돌아오는 마음으로. 속세를 살지만 속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