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소음이 통로가 될 때

영화 시라트(Sirāt, 2025, 올리베르 라셰)

by BEAU WOI

루이스는 처음부터 세상을 지옥으로 인식하는 인물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뉴스가 흘러나와도 그것은 먼 이야기이며, 자신의 일상이 직접적으로 위협받지 않는 한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사는 것이고, 지금 곁에 있는 딸을 보는 일이다. 반면 레이브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 중 한 명은 말한다. 전쟁으로부터 도망쳐 왔다고. “대통령님, 나는 전쟁이 싫어요.” 이 문장은 농담처럼 던져지지만, 그들이 이미 세상 속의 어떤 지옥을 루이스보다 먼저 인식했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말하는 지옥은 반드시 폭격과 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족함 없이 충족된 삶 속에서도, 세상이 회색빛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감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 풍요 속에서조차 발생하는 생의 공허. 누군가는 폭력 속에서, 누군가는 붕괴 속에서,누군가는 끝없는 불안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지옥을 마주한다.


레이브는 그들에게 통로였다. 지옥 같은 세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한 방법, 사회적 역할로서의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장치. 이를 도피라고 부르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도피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견디기 위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생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일 때도 있다. 이 영화에서 〈시라트〉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길 역시 물리적인 이동 경로라기보다는 존재적인 통과의 국면에 가깝다. 돌아가든, 나아가든, 결국 마주해야 하는 어떤 상태.


루이스에게 레이브는 처음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은 그저 소음이었다. 길 위에서 잠시 스쳐 가는 배경음. 그가 나아간 이유는 단 하나, 딸을 찾기 위해서였다. 딸이 왜 레이브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브는 목적이 아니라 이정표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미 레이브를 살아온 사람들은 말한다. 딸의 눈이 슬퍼 보였다고.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루이스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즉각적으로 감지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루이스는 더 이상 지옥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뉴스 속에 머물러 있던 지옥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그에게 레이브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사막에서 하나의 전환이 발생한다. 레이버들이 레이브를 위해 수없이 지나왔던 사막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미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조차 같은 사막은 다르게 다가온다. 먼 지옥에서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가까운 지옥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시라트〉라는 제목에 기대어 보자면, 사막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아무것도 없음, 숨길 수 없음, 알 수 없음, 판단할 수 없음. 의미가 작동하지 않는 구간. 그럼에도 몇몇은 세상에서 도피를 가능하게 했던 레이브 음악을 다시 꺼내 든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그 도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벗겨진 곳에 다시 무언가를 덧입히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괜찮았던 거지?” 레이버들의 이 자조는 영화의 구조를 정확히 겨냥한다. 어떤 도구를 쥐고 내면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그 도구가 무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지뢰가 깔린 사막은 그 한계를 가시화한다.


아무 준비 없이 그곳에 들어온 루이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운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그의 생존은 내려놓음에 기반한 두려움 없음이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 반면 폭사한 이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존재의 길은 판단이나 앎을 도구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있음’을 인식하는 데에만 겨우 닿을 수 있을 뿐이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사막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숨김없이 드러난다. 경험과 지식은 결국 ‘앎’으로 환원되며, 끝까지 가져갈 필수품은 아니다. 루이스의 발자국을 따라간 사람이 죽은 이유도 같다. 이 길은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려놓고, 두려움 없이, 판단 없이 가는 것만이 허락된다. 정확히는, 두려움이 없다는 선언은 객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진짜 두려움 없음에 가깝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종종 또 다른 도피일 뿐이다. 그렇게 루이스는 그 순간을 통과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첫 번째 통과자가 된다. 그 다음으로 살아남은 이는 루이스의 방법이 아니라 그의 태도를 믿는다. 두려움을 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시라트〉는 상징적인 영화이기도 하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내면의 경로도 그린다. 허무가 아닌,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삶, 그 지속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는 필연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지옥 혹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어떻게 존재를 향한 길과 내면의 빛나는 방향성을 쥐고 갈 것인가. 물리적인 삶 속에서 모든 순간을 그런 태도로 살아내는 것은 어려워서,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해 돌아가고, 때로는 도구(레이브)를 다시 집어 들며 산다. 그러나〈시라트〉가 말하듯,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어떤 형태든, 지옥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내면의 길, 존재를 향한 길로 들어선다.


〈시라트〉가 보여주는 대답은 비유적이되 명확해 보인다. 그것은 지금 당장 물리적인 현실에서 작은 자아의 성취나 결단으로 구현해내는 단기적인 문제가 아니다. 도구로 경험할 수 있지만 붙잡을 수 없고, 목표로 설정하는 것도 모르기에, 할 수 없다. 그 순간이 오면, 자연스럽게 그 빛을 따르게 되는 것. 판단 이전의 태도로 이미 알고 있는 방향에 몸을 내맡기는 일. 물론, 그전까지는 물리적인 지옥 속에서 역할에 노력을 다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살아남은 그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 역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지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아간다. 무언가를 마음에 품은 채.


이 영화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나 탈출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잊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계속 살아가는 방법론적 가능성이다. 소음이 통로가 되었던 순간 이후에도, 사막이 끝난 뒤에도, 지옥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 껍데기로서가 아닌, 내면에 어떤 것을 품은 채로. 그것이 〈시라트〉가 말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며, 가장 조용한 희망이다.

작가의 이전글제7-2화 단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순수